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16 05:11 【독서편지】: 제 61 호 風磬 조회 수 8,149 추천 수 23 댓글 1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61 호4339.11.16 (09.26)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그림자를 두려워 말라. 그림자란 빛이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비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 루스 E.렌컬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만나고 싶은 그 여자 내가 이 어둡고 암울한 일상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을 때, 내 옆자리에 마누라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앉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은근히 나를 기분좋게만든다. 솔직하게 말해 버리자. 마누라가 또 어떻게 트집을 잡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 버리자, 나는 내 옆자리에 최소한 마누라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앉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어린애와 할머니에 대해서도 썩 즐거운 느낌을 가질 자신이 없다.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비 개인 아침 한 다발 화초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좋겠다. 말을 걸면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여자, 머리속은 텅텅 비어 있는데 창자 속만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여자는 싫다. 될 수 있으면 많이 읽은 여자, 그리고 그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젖어 있는 여자가 좋다. 여행은 무엇 때문에 떠나는 것인가. 말라붙은 가슴에 무엇인가를 적시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젖을 만한 가슴이 없는 여자도 싫다. 이 각박 살벌하고 메마른 시대. 우리가 매표원의말 무심한 손짓 한번에 의해서 아주 가까운 자리에 함께 앉게 되고, 그래서 잠시 사랑을 느꼈다고 해서 또 그것이 무슨 날벼락이라도 맞을 만한 죄가 되랴. 목적지에 닿으면 우리는 헤어지고 마는 것을, 그 한 순간의 잔물결같이 여리디 여린 사랑도 이내 잊혀지고야 마는 것을, 비록 남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다 같은 단군의 자손. 그 한 순간만이라도 사랑을 느끼는 일은 소중하다. 그러나 나는 이 여름이 다 가도록 여행 한번 못하고 혹 시내 버스옆자리에 앉아 줄 여자라도 기대해 보았지만 번번이 할머니들께 자리를 양보하는 일들만 일어나곤 했었다. 얼마나 외로운 여름이었는지 !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 박종기(국민대 교수) 출세에는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했었나 유청신과 박구가 재상이 된 것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능력도 있었지만 시대상황과 조건도 이들의 출세에 한몫을 하였다. 이들이 활동하던 때에는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이 있었다. 또한 원나라에서는 왕실의 권력투쟁 결과 내안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잔당인 합단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고려군이 출정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고려로서는 무인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왕권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국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원나라를 돕는 대신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충렬왕은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적극적이었는데, 거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일본정벌과 내안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원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던 고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원나라는 충렬왕의 정치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는 대가로 소기의 목적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고려와 원나라는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유창한 몽고어를 구사하는 역관 유청신이나 무예가 뛰어난 박구는 양국간의 외교적 군사적 관계를 원활하게 풀어주는 데 아주 필요한 존재였다. 고려 전기 부곡인의 처지와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근본 원인은 군현과 부곡지역으로 각각 지역을 묶어 인간의 지위를 차별화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구조가 크게 변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고려 후기에는 전기와 같은 사회제도의 틀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사회였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의식도 변화하였다. 유청신과 박구가 부곡인으로 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고려 후기사회는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귀족정치가 활짝핀 12세기 무렵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12세기 이후부터 고려사회는 지역간의 발전격차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부곡지역에 대한 차별적인 수취는 여전하였다. 따라서 지역과 신분의 굴레가 이제 부곡인에게 하나의 사회모순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대하여 이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거주지를 떠나 먼 산간 벽지로 도망하였는데, 이를 유망이라 하였다. 고려시대는 다른 시대와 달리 민들의 유망현상이 더 많았다. 이는 본관제에 의해 거주지별로 법적 제도적 차별을 받았으므로, 이를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은 해당 지역을 도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았던 부곡민이 더 많이 유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제재로 유망이 점차 어렵게 되자, 12세기 후반에는 정부에 반기를 들고 직접 지방관과 정부를 공격하는 항쟁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촉발시킨 또 하나의 계기는 1170년 무인들의 쿠데타였다. 하급 군인들이 귀족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사실은 부곡인뿐만 아니라 하층민에게 지역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1198년 개경의 노비 만적은 봉기를 모의하면서 ‘무인정변 이후 천한 사람들이 많이 관직을 얻었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기회가 오면 될 수 있다’고 한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무인쿠데타 소식은 이들에게 하나의 기회와 희망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하층민들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정변으로 권력을 잡아 자신의 처지를 얼마든지 바꾸어 나가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이제 제도와 법에 의한 제약과 굴레는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무인정변 이후 약1세기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부곡지역은 항쟁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1176년 공주 부근의 명학소에 거주한 망이, 망소이 형제가 봉기하였다. 이들 형제는 ‘비록 놈들의 칼날에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놈들을 없애버리겠다’는 비장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 말 속에는 그들을 차별하였던 정부에 대한 반감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제 부곡이라는 행정구역은 이름뿐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 이후 사회구조의 변동과 함께 하층민의 사회의식이 성장한 결과였다. 이로써 부곡지역이 해체,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부곡인은 부곡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유청신이 부곡지역을 벗어나 역관의 길로 들어선 것이나, 박구와 같이 재산을 모아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단순히 이들의 개인능력이나 시대상황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부곡제와 같은 전기 사회구조의 틀이 무너진 것이 더 중요한 배경이었다. 고려 후기 하층민이 신분을 상승하는 길은? 원과의 전쟁이 종식되고 양국간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 지면서 새로운 인물들이 지배계층으로 많이 편입하였다. 그 과정은 이전부터 정상적인 통로로 인정되었던 과거제도를통해서가 아니었다. 몽고어에 익숙하거나, 일본에 원정하여 공로를 세우거나, 원나라의 환관이 되거나, 고려국왕이나 왕족의 시종이 되어 출세하였다. 여자의 경우 원 왕실이나 고관의 부인이 되면 그 집안까지도 현달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현달한 인물들은 문벌이나 학문적 능력으로 관리가 되었던 명문가의 자제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가계에 흠이 있거나, 출신지의 제약을 받은 노비 부곡인 등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세하더라도 서로 무리를 이루어 국왕이나 권력자에 기대는 측근이 되어, 당시 유행한 측근정치의 한 축을 이루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유청신과 같은 역관출신의 조인규였다. 그는 고려말 위화도 회군 후 정도전과 함께 사전을 개혁하여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이 된 조준의 증조부였다. 조인규는 평양부근의 상원군 사람으로 원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몽고어에 능통하여 출세하였다. 그의 딸이 충선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그도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는 같은 역관 출신인 유청신과 함께 정치행로를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은 역관출신으로 세력집단을 이루어 정치적 지위를 이어갔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이어져 당시 신흥 명문가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심지어는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 노비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민족의 시련기라는 원간섭기가 오히려 이들에게는 새로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기회와 희망의 시대로 비춰졌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역설적인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돈벌기가 쉬운 줄 아니? "아빠 만원만." "넌 아침마다 돈이냐? 아빠가 돈으로 보여!" 대학에 입학한 뒤로 매일 반복되는 아버지와 나의 대화이다. 아버지는 돈을 아껴 쓸 줄 모르는 나 때문에 골치 아파하셨고, 나는 나대로 이왕 주실 돈이면 기분좋게 주시지 왜 저렇게 잔소리가 많으신 걸까 하고 항상 불만이었다. 시간은 왜 그리 빠른지 한 학기가 금세 지나고 여름 방학이 되었다. 그날 아빠는 갑자기 나를 부르시더니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구해 놨으니 하라고 하셨다. "이놈아, 고생좀 해봐라."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공장은 냉장고와 세탁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조립하고 검사하는 곳이었다. 여름이 한창 성수기라 그런지 모두들 분주해 보였다. 두려움에 떨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이것저것 일을 배우느라 두려움도 잊어버렸다. 일을 마치고 피곤에 지쳐 집에 돌아오니 팔에 멍이 들어 있었다. 삼일 쯤 지나자 어개가 내려앉은 것 같았고 "아이고"하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십오일쯤 지나자 일이 익숙해졌다. 예전에 힘들어 했던 일들도 훨씬 수월하게 느껴졋다. 그러고 나니 출근하고 일하는 반복적인 생활이 싫증나기 시작했다. 입을 비죽거리면서 불만을 터트리자 부모님은 따끔하게 한마디 하셨다. "넌 한달만 하고 말 일을 거기있는 사람들은 매일 하고 있어. 그 사람들이라고 지겹고 피곤하지 않겠니?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다. 돈 버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거 나 스스로에게도 놀란 것이 있다. 그것은 십원 짜리 동전 하나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겨울 방학때도 아르바이트 할래?"하고 물으시자 난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요, 공부해서 장학금 탈래요!" "하하하....." 채지연 님/부산시 해운대구 반송1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1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블레주 파스칼(1623--1662년) 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칭, 일조편법 실시: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60년: 영국, 왕정복고, 찰스 2세 즉위 천재는 단명하다든지,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든 천재가 단명하거나 요절한 것은 아니다. 괴테는 천재 중의 천재였으나 오래 살았고, 영국의 J. S. 밀도 천재였으나 오래 활동했다. 비범한 천재로 평가받았던 라이프니츠도 70살까지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브랑슈,파스칼 등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본다면 철학계에는 두 종류의 천분을 지닌 철학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일찍 학문적 업적을 끝낸 사람과 늦도록 학문적 발전을 지속시켜나간 사람이다. 독일의 철학자 셸링은 30사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철학적 업적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천재는 지능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일찍 학문과 사상을 개척해나간다. 그 대신 장년기 후반이나 노년기에는 별로 발전적 성과를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지능은 일찍 높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는 대기만성파가 있다. 그런 사람은 같은 천분을 지니고 있었어도 천재라는 명칭에는 덜 해당되는 것 같다. 음악계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경우가 그러했을 것 같다. 이상스럽게도 영국의 철학자들은 대개가 늦도록 철학을 발전시켜나간 편이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일찍 철학적 천분을 발휘한 편이다. 물론 칸트와 헤겔 같은 사람은 예외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천재적 창조력을 발휘한 라이프니츠 같은 이가 없는 것은 아니... 우리가 이런 덜 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은 17,8세기까지의 철학자들의 기질을 비교해보자는 것일 뿐이다. 19세기 이후의 대분분의 철학자들은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이며 장년기 이후에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이 보통이었다. 철학은 역시 문제의식과 연결되며, 큰 그릇이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철학의 학문적 성격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삽입시킨 것은 데카르트 연구에 뜻을 가졌다가 개인의 체험과 신념 때문에 다른 방향의 업적을 남겨준 블레즈파스칼(B. Pascal, 1623--1662)을 소개하는 데 길잡이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전통적 흐름을 탄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였고 그의 천재성은 데카르트를 앞지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 기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공부했고, 기계공학적 분야에서 이론과학의 영역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철학적 조예도 깊었던 편이었다. 파스칼이 이런 학문들을 전개켜가는 동안에 기독교 신앙에 관한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고, 이성적 합리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신의 은총의 사실과 질서를 변증하는 신앙적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 남겨놓았던 메모들이 사후에 정리되어 책자가 되었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팡세"로 남게 된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메모들은 후일에 그가 한 권의 대표적인 저서로 완성시키고 싶었던 기초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로 일찍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저작화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파스칼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 "팡세"가 알려지지도 못했다. 사후에 그의 측근들이 그 메모들을 모아 출간했을 때도 사상계의 관심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 볼테르는 아예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팡세"는 넓은 계층의 독자를 확보해나갔고,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인 걸작으로 지금도 읽히고 있다. 물론 기독교계가 그 배경을 만들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을 정도다. 지금은 그 당시의 어떤 철학자의 사상과 학문보다도 광범위한 의의를 사상계에 남겨주고 있다. 오히려 이를 낮게평가했던 볼테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그의 기독교적 사상이나 종교철학적 의미가 아니다. 그가 남겨준 철학적 사색과 업적이 컸다는 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합리주의가 가장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이러한 특이한 사상가가 있었다는 것은 가벼이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느 아우그스티누스의 철학적 신학이 철학사에 큰 자취를 남겨주었던 것과 19세기에 S.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철학계와 신학계에 미친 영향과 비슷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파스칼을, 1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유구한 인간적 과제를 풀이해준 공로자라고 평하고 있다. 심리학자 아니었음에도 오늘과 같이 인간학이 개척되지 않은 시대에 너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주었던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다니다'는 원래 '달려 간다'는 뜻 어느 곳에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다닌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달려 간다는 뜻이었다가 이러한 뜻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닫다'(달릴 주)와 '니다'(갈 행)의 어간들인 '닫-'과 '니-'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닫니다'는 '달려간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이 '단니다'로 변하고 다시 '다니다'로 변했습니다. 뜻이 엉뚱하게 변한 것 중의 하나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깨달음과 죽음이 남달랐던 제논/벽송 92세의 자살, 삶이 너무 지루했을까 - 제논 제논은 그리스의 철학자로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이다. 엄숙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는 아파테이아의 최고의 선을 살고 간 한 사람의 현자였다. 그는 지중해 해안의 키프로스 섬에서 자랐다. 상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아테네로 간 것은 17세의 때의 일이다. 물감을 싣고 가던 배가 난파를 당하자 제논은 아테네의 어느 서적상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철학책을 보게 된다.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기>를 읽고는 소크라테스에게 매혹된다. 제논은 책방 주인에게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를 소개받고 싶어했다. 마침 그때 크라테스가 그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통 속에서 살던 디오케네스처럼 그도 거처할 집도 없이 오직 철학에만 몰두하는 견유학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논이 크라테스의 교단에 들어갔을 때 그는 머슴에 불과했다. 밥짓고 빨래하고 크라테스가 하라는대로 일하는 것 뿐이었다. 한 해가 지나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제논이 죽을 담은 큰 항아리를 이고 돌아오는데 크라테스가 거기에 돌을 던졌다. 항아리는 깨지고 죽이 흘러내렸다. 제논은 크라테스의 욕이 무서워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페니키아의 얼빠진 녀석아! 뭐가 무서워 도망을 치는 거냐?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던 제논은 발길을 멈추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왜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무었 때문에? 무엇이 무서워서 그때 제논의 가슴에는 한 줄기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는 달아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스토아의 시조, 제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토아주의는 에피쿠로스처럼 삶의 의미를 쾌락과 향유에서 찾는게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일치에서 찾는다. 어떻게 해야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합치되어 살게 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제논은 말한다. 즉 자기 자신과 합일하여 행동하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본성을 실현하는 사람이 동시에 우주의 포괄적 법칙과도 합치되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먹고사는 생활은 간단했으며 그의 남루한 외투는 혐오감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 욕심없는 사람을 철학자 제논 이라고들 한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높게 평가되었다. 마케도니아왕조차도 아테네에 체류할때마다 제논의 강의를 놓치지 않았다. 존경의 표시로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황금관을 수여하고, 입상과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는 강의를 계속하는 한편 저술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의 사상은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형성되는데 이 세 부분의 저서가 23가지나 된다. 그는 극진한 존경을 받으면서 교사생활로 생애를 마감한 92세의 죽음 또한 남다른 것이기에 소개한다.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제논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손가락을 다쳤다. 그때 그는 땅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곧 갈 건데 왜 이렇게 야단이냐. 죽음의 시간을 알리는 신들의 예고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서둘러 돌아가야만 하는 것처럼 지체없이 떠났다. 기원전 246년의 일이다. 그의 학통은 세네카, 절름발이 노예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졌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5.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상 단 한 사람의 여황제인 측천무후는 원래 관리의 딸이었다.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14세에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의 비가 되었지만 태종이 죽자 관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아들 고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궁인 그녀를 좋아했다. 당시 후궁에서는 정비인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고종의 마음이 소숙비에게로 기우는 것을 질투한 왕황후는 절에 있는 무조(측천무후의 본명)를 궁궐로 불러들여 소숙비를 견제했다. 그러나 총명한 그녀는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황후와 소숙비를 쫓아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 이어 병약한 고종을 대신, 정무를 보기에 이르렀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신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 두 사람을 재위에 않혔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마음에 안 차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주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에 등극한 그녀는 왕황후, 소숙비와 자신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조정대신들을 죽였다. 또 자기가 죽인 후궁의 30세가 넘은 두 딸을 출가시키자고 했다는 이유로 장남 이홍을 죽였고,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차남 이현에게는 모반의 혐의를 씌워 자결을 명령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무후는 추사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스파이 정치를 자행했다. 주로 반대 세력의 관리들이 희생물이었는데 추사원의 정문인 여사문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자가 드물어 이곳의 부름을 받은 관리들은 아예 가족들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환갑을 넘긴 측천무후는 미소년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가까이하고 남첩제도를 만들었다. 이의 부당함을 진언한 태자의 장남, 즉 자신의 맏손주도 역시 살해되고 말았다. 그녀는 또 당의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미신적인 종교 생활에 평생을 의지하기도 했다. 정신 이상의 광기마저 엿보이던 무후는 705년, 83세로 숨을 거뒀다. 잔학무도했던 사생활과는 달리 무후 시대의 정치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까지 폐쇄적인 기득권층을 형성하며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개국공신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무후는 유명무실하던 과거제를 공정하게 실시, 실력있는 신인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들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장안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여, 이들은 `북문지사`라고 불리게 된다. 이 북문지사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곧 이어지는 현종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에서 당문화의 절정을 꽃피우게 된다. 후세 사가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서만은 무후를 `일급의 감식가`로 평가하고 있다. 무후가 무참한 칼날을 휘둘렀던 대상도 그녀로 인해 좌천된 사람들과 황족 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무후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민중 생활의 안정에 신경을 썼고 이에 따라 그녀의 치세 50년간에는 그 흔하던 농민 봉기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된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4.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미국의 외교 .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국제문제에 간여하거나 국가 간에 발생한 문제를 처리할 때는 반드시 성실과 신의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나라는 최대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지만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거나 사기, 함정, 헛소문 따위로 국민을 현혹하는 따위는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소련이 와해된 뒤로 미국은 어느 장소에서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국이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할 사명이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 미국인은 정이 많아 이런 '하늘이 내린 자신감'을 자원하여 가지려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벌이는 외교적 조치를 보면 미국인은 유치한 것인지 아니면 교활한 것인지를 알 수 없을 만큼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대만총통 리떵후이의 코넬대학 방문을 허락할 당시 의 일이다. 당시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자신의 입으로 중국의 외교부장 첸치천(鎭其澤)에게 미국으로서는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기 때문에 리떵후이 대만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 줄 수 없다고 말했었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이 중국에게 한 약속이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크리스토퍼는 결코 이 말을 자기집 부엌에서 마누라에게 지껄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국무장관의 자격으로 다른 나라 외교부장에게 약속했다. 둘째 그 말은 술에 취했거나 미국 사법용어인 소위 '정신이상' 상태에서 한 말도. 위협이나 유혹을 받아 본의 아니게 한 말도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미국을 믿고 있었는데. 1주일 만에 백악관에서는 리떵후이에 게 입국비자를 발급할 것이라고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이런 결정을 한 배경을 설명하였다. 리떵후이의 이번 방문은 한 차례에 국한된 '사적인 방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는 단순히 코넬대학의 동문 자격으로 모교에서 벌어지는 기념행사에 참가할 뿐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으로서는 이런 방문을 거절할 아무런이유가 없으며, 리 총통의 방문은 '중 .미 합동성명'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장쩌민이 [뉴스위크]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인민은 리떵후이의 미국방문 비자발급에 대해 배신과 모욕을 당했으며 그에 대해 분노를 느킨다고 솔직히 말하였다. 미국인들은 늘 이유가 있었고 미국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그렇게 정확하더란 말인가?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기 때문에 리떵후이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없다고 하더니 갑자기 또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리떵후이에게 비자를 발급해야만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미국의 진정한 목소리인가 말이다. 미국인들은 무슨 재주가 있기에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는 내용을 1주일 만에 위배되지 않는 내용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였을까? 미국인들은 항상 중국을 위시한 전세계의 국가에 '우리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모두 옳다'라는 식으로 그들의 태도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인들은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다. 중국인들은 2년 전에 일어났던 '인허하오(銀河號)'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미국인은 또 한 차례 '나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라는 식의, 자기 스스로 세계 경찰역할을 한답시고 도둑이 도둑을 잡는 무법천지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었다. 미국은 중국의 배 '인허하오'가 중동의 어느 국가에서 금지된 화학품을 운반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는 구실로 배를 끌어다가 강제로 그들의 검문에 응하게 하였다. 이때 '인허하오'가 검문을 거절하였다면 전세계는 즉각 중국인이 나쁜 짓을한다며 시끌시끌했을 것이고,거꾸로 '인허하오'가 검문에 응한다면 전세계에는 미국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없으며 미국이 못할 일이 없다고 설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그들의 동기는 지나치게 사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인허하오'를 철저히 까발려 본 후 전세계에 이 사실을 알렸던가?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중국이 뒤집어쓰고 있던 누명을 씻게 하였던가? 미국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미국은 국제관계에서 항상 독단적이고 그 속셈이 사악하며 위선적이고 책임을 지지 않는 가증스런 모습을 드러내는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지닌 몇 가지 기본적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16억 불이나 되는 유엔회비조차도 납부하지 않는 나라이다.최근 어느 의원이 이 빚을 갚으라고 종용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유엔에서 자기 마음대로 이런저런 안건이나 성명을 꾸며내고 유엔의 힘을 빌어 전세계를 호령하려 들고 있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을 겨냥하여, 일정한 기한까지 유엔회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회원국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는 안건을 제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유엔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불공정한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용감하게 수행해야 하며, 강대국이 힘만 믿고 유엔을 빌미로 자국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타국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부결권을 행사해야할 것이며 과감하고도 큰 소리로 'No'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썩지 않는 고무신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땅 속에 파묻혀 있다. 낮이면 맑은 햇살,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온몸에 맞고 싶고, 밤이면 따스한 별빛 한번 바라보고 싶어도 컴컴하고 습기찬 이곳 흙 속에 파묻혀 있다. 이제 나와 함께 파묻힌 것들은 모두 다 썩어 버렸다. 내가 사랑하던 소년의 노트도, 일기장도, 책가방도, 어머니한테 쓴 편지도 이제는 모두 썩어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 나는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그 소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 소년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80 년 5월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발에 신겨 있었다. 소년은 수업을 일찍 끝내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년은 논둑 옆 개울가를 걷고 있었고, 마을에는 손에 총을 든 군인들이 진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 땅에 또다시 악독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야, 우리 개구리 잡으면서 놀다 갈까?" 소년의 친구가 소년에게 말했다. "개구리가 불쌍하다. 우리 종이배를 만들어 띄우자." 소년들은 개울가에 앉아 종이배를 만들었다. 나의 소년은 허드레 연습장 종이로 만든 종이배를 띄웠고, 다른 소년들은 영어나 수학 시험지로 만든 종이배를 띄웠다. 소년들은 우르르 종이배를 따라갔다. 종이배는 온몸에 햇살을 가득 싣고 기우뚱기우뚱 거리며 흘러갔다. 나는 신이 났다. 나도 종이배를 따라 푸른 바다로 흘러가고 싶었다. 총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느닷없이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총소리에 파묻혔다. 소년들은 냅다 뛰었다. 나의 소년도 얼른 논둑길로 뛰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발에서 벗겨졌다. 순간, 소년이 나를 뒤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즉시 나에게 향해 달려왔다. "돌아가!"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잘못하면 죽어! 돌아가란 말이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년은 나의 고함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 총알 하나가 소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은 그때였다. 개울가에 벗겨진 나를 막 주우려는 순간, 소년은 "아!"하는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푹 거꾸러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개울가에 앉아 나를 안고 통곡했다. 군인들이 마을을 떠난 뒤, 나는 소년의 책가방과 함께 개울가에 파묻혔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 소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만은 아직도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소년이 이 땅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썩지 않았다. 기다림은 우리를 썩지 않게 만든다. 글터 → 이글저글 나폴레옹이 만들어낸 성녀 잔다르크 그녀는 1412년 도므레미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프랑스 왕실의 관할령이 아닌 자치주였다. 따라서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19세기까지 영웅으로 불리지 않았다. 죽은 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금방 사라져서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전설에서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18세기 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을때 나폴레옹은 프랑스 민족주의를 고양시킬수 있는 상징적인 영웅이 필요하였고 잔다르크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성인들의 대열에 들어간 것도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나폴레옹의 이력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은 16세에 프랑스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되었고, 24세에 툴롱 반도의 진압에 무훈을 세워 소장이 되었다. 26세에는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하였고, 33세에 종신 통령에 임명되었으며, 35세에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인간의 역사 3500년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겨우 230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3270년 동안은 계속 전쟁속에서 살아온 셈이다.BC1300년경 이집트의 왕 메네프타는 리비아아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카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승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리비아군 13,000명의 음경을 잘라 전리품으로 갖고 왔다.징기스칸은 니샤푸르에서 한 시간에 1,748,000명을 죽였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23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Comments '1' 호단 2006.11.16 06:01 #comment_7990 <P>연꽃이 화사하게 보이네...</P> <P> </P> <P>맘도 그러면 좋으련만.</P> 수정 삭제 댓글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30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59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387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402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68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52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61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954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812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817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10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570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16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16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22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465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63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25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60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50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319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375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독서편지】: 제 61 호4339.11.16 (09.26)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그림자를 두려워 말라. 그림자란 빛이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비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 루스 E.렌컬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만나고 싶은 그 여자 내가 이 어둡고 암울한 일상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을 때, 내 옆자리에 마누라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앉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은근히 나를 기분좋게만든다. 솔직하게 말해 버리자. 마누라가 또 어떻게 트집을 잡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 버리자, 나는 내 옆자리에 최소한 마누라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앉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어린애와 할머니에 대해서도 썩 즐거운 느낌을 가질 자신이 없다.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비 개인 아침 한 다발 화초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좋겠다. 말을 걸면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여자, 머리속은 텅텅 비어 있는데 창자 속만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여자는 싫다. 될 수 있으면 많이 읽은 여자, 그리고 그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젖어 있는 여자가 좋다. 여행은 무엇 때문에 떠나는 것인가. 말라붙은 가슴에 무엇인가를 적시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젖을 만한 가슴이 없는 여자도 싫다. 이 각박 살벌하고 메마른 시대. 우리가 매표원의말 무심한 손짓 한번에 의해서 아주 가까운 자리에 함께 앉게 되고, 그래서 잠시 사랑을 느꼈다고 해서 또 그것이 무슨 날벼락이라도 맞을 만한 죄가 되랴. 목적지에 닿으면 우리는 헤어지고 마는 것을, 그 한 순간의 잔물결같이 여리디 여린 사랑도 이내 잊혀지고야 마는 것을, 비록 남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다 같은 단군의 자손. 그 한 순간만이라도 사랑을 느끼는 일은 소중하다. 그러나 나는 이 여름이 다 가도록 여행 한번 못하고 혹 시내 버스옆자리에 앉아 줄 여자라도 기대해 보았지만 번번이 할머니들께 자리를 양보하는 일들만 일어나곤 했었다. 얼마나 외로운 여름이었는지 !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 박종기(국민대 교수) 출세에는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했었나 유청신과 박구가 재상이 된 것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능력도 있었지만 시대상황과 조건도 이들의 출세에 한몫을 하였다. 이들이 활동하던 때에는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이 있었다. 또한 원나라에서는 왕실의 권력투쟁 결과 내안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잔당인 합단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고려군이 출정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고려로서는 무인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왕권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국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원나라를 돕는 대신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충렬왕은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적극적이었는데, 거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일본정벌과 내안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원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던 고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원나라는 충렬왕의 정치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는 대가로 소기의 목적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고려와 원나라는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유창한 몽고어를 구사하는 역관 유청신이나 무예가 뛰어난 박구는 양국간의 외교적 군사적 관계를 원활하게 풀어주는 데 아주 필요한 존재였다. 고려 전기 부곡인의 처지와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근본 원인은 군현과 부곡지역으로 각각 지역을 묶어 인간의 지위를 차별화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구조가 크게 변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고려 후기에는 전기와 같은 사회제도의 틀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사회였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의식도 변화하였다. 유청신과 박구가 부곡인으로 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고려 후기사회는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귀족정치가 활짝핀 12세기 무렵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12세기 이후부터 고려사회는 지역간의 발전격차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부곡지역에 대한 차별적인 수취는 여전하였다. 따라서 지역과 신분의 굴레가 이제 부곡인에게 하나의 사회모순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대하여 이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거주지를 떠나 먼 산간 벽지로 도망하였는데, 이를 유망이라 하였다. 고려시대는 다른 시대와 달리 민들의 유망현상이 더 많았다. 이는 본관제에 의해 거주지별로 법적 제도적 차별을 받았으므로, 이를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은 해당 지역을 도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았던 부곡민이 더 많이 유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제재로 유망이 점차 어렵게 되자, 12세기 후반에는 정부에 반기를 들고 직접 지방관과 정부를 공격하는 항쟁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촉발시킨 또 하나의 계기는 1170년 무인들의 쿠데타였다. 하급 군인들이 귀족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사실은 부곡인뿐만 아니라 하층민에게 지역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1198년 개경의 노비 만적은 봉기를 모의하면서 ‘무인정변 이후 천한 사람들이 많이 관직을 얻었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기회가 오면 될 수 있다’고 한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무인쿠데타 소식은 이들에게 하나의 기회와 희망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하층민들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정변으로 권력을 잡아 자신의 처지를 얼마든지 바꾸어 나가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이제 제도와 법에 의한 제약과 굴레는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무인정변 이후 약1세기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부곡지역은 항쟁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1176년 공주 부근의 명학소에 거주한 망이, 망소이 형제가 봉기하였다. 이들 형제는 ‘비록 놈들의 칼날에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놈들을 없애버리겠다’는 비장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 말 속에는 그들을 차별하였던 정부에 대한 반감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제 부곡이라는 행정구역은 이름뿐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 이후 사회구조의 변동과 함께 하층민의 사회의식이 성장한 결과였다. 이로써 부곡지역이 해체,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부곡인은 부곡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유청신이 부곡지역을 벗어나 역관의 길로 들어선 것이나, 박구와 같이 재산을 모아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단순히 이들의 개인능력이나 시대상황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부곡제와 같은 전기 사회구조의 틀이 무너진 것이 더 중요한 배경이었다. 고려 후기 하층민이 신분을 상승하는 길은? 원과의 전쟁이 종식되고 양국간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 지면서 새로운 인물들이 지배계층으로 많이 편입하였다. 그 과정은 이전부터 정상적인 통로로 인정되었던 과거제도를통해서가 아니었다. 몽고어에 익숙하거나, 일본에 원정하여 공로를 세우거나, 원나라의 환관이 되거나, 고려국왕이나 왕족의 시종이 되어 출세하였다. 여자의 경우 원 왕실이나 고관의 부인이 되면 그 집안까지도 현달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현달한 인물들은 문벌이나 학문적 능력으로 관리가 되었던 명문가의 자제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가계에 흠이 있거나, 출신지의 제약을 받은 노비 부곡인 등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세하더라도 서로 무리를 이루어 국왕이나 권력자에 기대는 측근이 되어, 당시 유행한 측근정치의 한 축을 이루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유청신과 같은 역관출신의 조인규였다. 그는 고려말 위화도 회군 후 정도전과 함께 사전을 개혁하여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이 된 조준의 증조부였다. 조인규는 평양부근의 상원군 사람으로 원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몽고어에 능통하여 출세하였다. 그의 딸이 충선왕의 왕비가 되었으며 그도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는 같은 역관 출신인 유청신과 함께 정치행로를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은 역관출신으로 세력집단을 이루어 정치적 지위를 이어갔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이어져 당시 신흥 명문가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심지어는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 노비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민족의 시련기라는 원간섭기가 오히려 이들에게는 새로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기회와 희망의 시대로 비춰졌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역설적인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돈벌기가 쉬운 줄 아니? "아빠 만원만." "넌 아침마다 돈이냐? 아빠가 돈으로 보여!" 대학에 입학한 뒤로 매일 반복되는 아버지와 나의 대화이다. 아버지는 돈을 아껴 쓸 줄 모르는 나 때문에 골치 아파하셨고, 나는 나대로 이왕 주실 돈이면 기분좋게 주시지 왜 저렇게 잔소리가 많으신 걸까 하고 항상 불만이었다. 시간은 왜 그리 빠른지 한 학기가 금세 지나고 여름 방학이 되었다. 그날 아빠는 갑자기 나를 부르시더니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구해 놨으니 하라고 하셨다. "이놈아, 고생좀 해봐라."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 공장은 냉장고와 세탁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조립하고 검사하는 곳이었다. 여름이 한창 성수기라 그런지 모두들 분주해 보였다. 두려움에 떨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이것저것 일을 배우느라 두려움도 잊어버렸다. 일을 마치고 피곤에 지쳐 집에 돌아오니 팔에 멍이 들어 있었다. 삼일 쯤 지나자 어개가 내려앉은 것 같았고 "아이고"하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십오일쯤 지나자 일이 익숙해졌다. 예전에 힘들어 했던 일들도 훨씬 수월하게 느껴졋다. 그러고 나니 출근하고 일하는 반복적인 생활이 싫증나기 시작했다. 입을 비죽거리면서 불만을 터트리자 부모님은 따끔하게 한마디 하셨다. "넌 한달만 하고 말 일을 거기있는 사람들은 매일 하고 있어. 그 사람들이라고 지겹고 피곤하지 않겠니?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다. 돈 버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거 나 스스로에게도 놀란 것이 있다. 그것은 십원 짜리 동전 하나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겨울 방학때도 아르바이트 할래?"하고 물으시자 난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요, 공부해서 장학금 탈래요!" "하하하....." 채지연 님/부산시 해운대구 반송1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51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블레주 파스칼(1623--1662년) 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칭, 일조편법 실시: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60년: 영국, 왕정복고, 찰스 2세 즉위 천재는 단명하다든지,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든 천재가 단명하거나 요절한 것은 아니다. 괴테는 천재 중의 천재였으나 오래 살았고, 영국의 J. S. 밀도 천재였으나 오래 활동했다. 비범한 천재로 평가받았던 라이프니츠도 70살까지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브랑슈,파스칼 등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본다면 철학계에는 두 종류의 천분을 지닌 철학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일찍 학문적 업적을 끝낸 사람과 늦도록 학문적 발전을 지속시켜나간 사람이다. 독일의 철학자 셸링은 30사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철학적 업적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천재는 지능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일찍 학문과 사상을 개척해나간다. 그 대신 장년기 후반이나 노년기에는 별로 발전적 성과를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지능은 일찍 높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는 대기만성파가 있다. 그런 사람은 같은 천분을 지니고 있었어도 천재라는 명칭에는 덜 해당되는 것 같다. 음악계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경우가 그러했을 것 같다. 이상스럽게도 영국의 철학자들은 대개가 늦도록 철학을 발전시켜나간 편이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일찍 철학적 천분을 발휘한 편이다. 물론 칸트와 헤겔 같은 사람은 예외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천재적 창조력을 발휘한 라이프니츠 같은 이가 없는 것은 아니... 우리가 이런 덜 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은 17,8세기까지의 철학자들의 기질을 비교해보자는 것일 뿐이다. 19세기 이후의 대분분의 철학자들은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이며 장년기 이후에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이 보통이었다. 철학은 역시 문제의식과 연결되며, 큰 그릇이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철학의 학문적 성격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삽입시킨 것은 데카르트 연구에 뜻을 가졌다가 개인의 체험과 신념 때문에 다른 방향의 업적을 남겨준 블레즈파스칼(B. Pascal, 1623--1662)을 소개하는 데 길잡이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전통적 흐름을 탄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였고 그의 천재성은 데카르트를 앞지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 기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공부했고, 기계공학적 분야에서 이론과학의 영역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철학적 조예도 깊었던 편이었다. 파스칼이 이런 학문들을 전개켜가는 동안에 기독교 신앙에 관한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고, 이성적 합리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신의 은총의 사실과 질서를 변증하는 신앙적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 남겨놓았던 메모들이 사후에 정리되어 책자가 되었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팡세"로 남게 된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메모들은 후일에 그가 한 권의 대표적인 저서로 완성시키고 싶었던 기초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로 일찍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저작화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파스칼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 "팡세"가 알려지지도 못했다. 사후에 그의 측근들이 그 메모들을 모아 출간했을 때도 사상계의 관심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 볼테르는 아예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팡세"는 넓은 계층의 독자를 확보해나갔고,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인 걸작으로 지금도 읽히고 있다. 물론 기독교계가 그 배경을 만들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을 정도다. 지금은 그 당시의 어떤 철학자의 사상과 학문보다도 광범위한 의의를 사상계에 남겨주고 있다. 오히려 이를 낮게평가했던 볼테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그의 기독교적 사상이나 종교철학적 의미가 아니다. 그가 남겨준 철학적 사색과 업적이 컸다는 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합리주의가 가장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이러한 특이한 사상가가 있었다는 것은 가벼이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느 아우그스티누스의 철학적 신학이 철학사에 큰 자취를 남겨주었던 것과 19세기에 S.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철학계와 신학계에 미친 영향과 비슷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파스칼을, 1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유구한 인간적 과제를 풀이해준 공로자라고 평하고 있다. 심리학자 아니었음에도 오늘과 같이 인간학이 개척되지 않은 시대에 너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주었던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다니다'는 원래 '달려 간다'는 뜻 어느 곳에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다닌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달려 간다는 뜻이었다가 이러한 뜻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닫다'(달릴 주)와 '니다'(갈 행)의 어간들인 '닫-'과 '니-'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닫니다'는 '달려간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이 '단니다'로 변하고 다시 '다니다'로 변했습니다. 뜻이 엉뚱하게 변한 것 중의 하나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3장 죽음과의 악수 깨달음과 죽음이 남달랐던 제논/벽송 92세의 자살, 삶이 너무 지루했을까 - 제논 제논은 그리스의 철학자로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이다. 엄숙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는 아파테이아의 최고의 선을 살고 간 한 사람의 현자였다. 그는 지중해 해안의 키프로스 섬에서 자랐다. 상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아테네로 간 것은 17세의 때의 일이다. 물감을 싣고 가던 배가 난파를 당하자 제논은 아테네의 어느 서적상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철학책을 보게 된다.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기>를 읽고는 소크라테스에게 매혹된다. 제논은 책방 주인에게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를 소개받고 싶어했다. 마침 그때 크라테스가 그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통 속에서 살던 디오케네스처럼 그도 거처할 집도 없이 오직 철학에만 몰두하는 견유학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논이 크라테스의 교단에 들어갔을 때 그는 머슴에 불과했다. 밥짓고 빨래하고 크라테스가 하라는대로 일하는 것 뿐이었다. 한 해가 지나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제논이 죽을 담은 큰 항아리를 이고 돌아오는데 크라테스가 거기에 돌을 던졌다. 항아리는 깨지고 죽이 흘러내렸다. 제논은 크라테스의 욕이 무서워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페니키아의 얼빠진 녀석아! 뭐가 무서워 도망을 치는 거냐?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던 제논은 발길을 멈추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왜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무었 때문에? 무엇이 무서워서 그때 제논의 가슴에는 한 줄기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는 달아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스토아의 시조, 제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토아주의는 에피쿠로스처럼 삶의 의미를 쾌락과 향유에서 찾는게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일치에서 찾는다. 어떻게 해야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합치되어 살게 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제논은 말한다. 즉 자기 자신과 합일하여 행동하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본성을 실현하는 사람이 동시에 우주의 포괄적 법칙과도 합치되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먹고사는 생활은 간단했으며 그의 남루한 외투는 혐오감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 욕심없는 사람을 철학자 제논 이라고들 한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높게 평가되었다. 마케도니아왕조차도 아테네에 체류할때마다 제논의 강의를 놓치지 않았다. 존경의 표시로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황금관을 수여하고, 입상과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는 강의를 계속하는 한편 저술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의 사상은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형성되는데 이 세 부분의 저서가 23가지나 된다. 그는 극진한 존경을 받으면서 교사생활로 생애를 마감한 92세의 죽음 또한 남다른 것이기에 소개한다.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제논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손가락을 다쳤다. 그때 그는 땅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곧 갈 건데 왜 이렇게 야단이냐. 죽음의 시간을 알리는 신들의 예고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서둘러 돌아가야만 하는 것처럼 지체없이 떠났다. 기원전 246년의 일이다. 그의 학통은 세네카, 절름발이 노예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졌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5.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상 단 한 사람의 여황제인 측천무후는 원래 관리의 딸이었다.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14세에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의 비가 되었지만 태종이 죽자 관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아들 고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궁인 그녀를 좋아했다. 당시 후궁에서는 정비인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고종의 마음이 소숙비에게로 기우는 것을 질투한 왕황후는 절에 있는 무조(측천무후의 본명)를 궁궐로 불러들여 소숙비를 견제했다. 그러나 총명한 그녀는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황후와 소숙비를 쫓아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 이어 병약한 고종을 대신, 정무를 보기에 이르렀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신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 두 사람을 재위에 않혔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마음에 안 차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주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에 등극한 그녀는 왕황후, 소숙비와 자신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조정대신들을 죽였다. 또 자기가 죽인 후궁의 30세가 넘은 두 딸을 출가시키자고 했다는 이유로 장남 이홍을 죽였고,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차남 이현에게는 모반의 혐의를 씌워 자결을 명령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무후는 추사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스파이 정치를 자행했다. 주로 반대 세력의 관리들이 희생물이었는데 추사원의 정문인 여사문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자가 드물어 이곳의 부름을 받은 관리들은 아예 가족들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환갑을 넘긴 측천무후는 미소년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가까이하고 남첩제도를 만들었다. 이의 부당함을 진언한 태자의 장남, 즉 자신의 맏손주도 역시 살해되고 말았다. 그녀는 또 당의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미신적인 종교 생활에 평생을 의지하기도 했다. 정신 이상의 광기마저 엿보이던 무후는 705년, 83세로 숨을 거뒀다. 잔학무도했던 사생활과는 달리 무후 시대의 정치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까지 폐쇄적인 기득권층을 형성하며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개국공신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무후는 유명무실하던 과거제를 공정하게 실시, 실력있는 신인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들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장안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여, 이들은 `북문지사`라고 불리게 된다. 이 북문지사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곧 이어지는 현종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에서 당문화의 절정을 꽃피우게 된다. 후세 사가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서만은 무후를 `일급의 감식가`로 평가하고 있다. 무후가 무참한 칼날을 휘둘렀던 대상도 그녀로 인해 좌천된 사람들과 황족 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무후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민중 생활의 안정에 신경을 썼고 이에 따라 그녀의 치세 50년간에는 그 흔하던 농민 봉기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된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4.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미국의 외교 .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국제문제에 간여하거나 국가 간에 발생한 문제를 처리할 때는 반드시 성실과 신의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나라는 최대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지만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거나 사기, 함정, 헛소문 따위로 국민을 현혹하는 따위는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소련이 와해된 뒤로 미국은 어느 장소에서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국이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할 사명이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 미국인은 정이 많아 이런 '하늘이 내린 자신감'을 자원하여 가지려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벌이는 외교적 조치를 보면 미국인은 유치한 것인지 아니면 교활한 것인지를 알 수 없을 만큼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대만총통 리떵후이의 코넬대학 방문을 허락할 당시 의 일이다. 당시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자신의 입으로 중국의 외교부장 첸치천(鎭其澤)에게 미국으로서는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기 때문에 리떵후이 대만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 줄 수 없다고 말했었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이 중국에게 한 약속이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크리스토퍼는 결코 이 말을 자기집 부엌에서 마누라에게 지껄인 것이 아니라 엄연한 국무장관의 자격으로 다른 나라 외교부장에게 약속했다. 둘째 그 말은 술에 취했거나 미국 사법용어인 소위 '정신이상' 상태에서 한 말도. 위협이나 유혹을 받아 본의 아니게 한 말도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미국을 믿고 있었는데. 1주일 만에 백악관에서는 리떵후이에 게 입국비자를 발급할 것이라고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이런 결정을 한 배경을 설명하였다. 리떵후이의 이번 방문은 한 차례에 국한된 '사적인 방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는 단순히 코넬대학의 동문 자격으로 모교에서 벌어지는 기념행사에 참가할 뿐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으로서는 이런 방문을 거절할 아무런이유가 없으며, 리 총통의 방문은 '중 .미 합동성명'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장쩌민이 [뉴스위크]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인민은 리떵후이의 미국방문 비자발급에 대해 배신과 모욕을 당했으며 그에 대해 분노를 느킨다고 솔직히 말하였다. 미국인들은 늘 이유가 있었고 미국인들이 하는 일은 모두 그렇게 정확하더란 말인가?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기 때문에 리떵후이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없다고 하더니 갑자기 또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리떵후이에게 비자를 발급해야만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미국의 진정한 목소리인가 말이다. 미국인들은 무슨 재주가 있기에 '중 .미 합동성명'에 위배되는 내용을 1주일 만에 위배되지 않는 내용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였을까? 미국인들은 항상 중국을 위시한 전세계의 국가에 '우리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모두 옳다'라는 식으로 그들의 태도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인들은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다. 중국인들은 2년 전에 일어났던 '인허하오(銀河號)'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미국인은 또 한 차례 '나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라는 식의, 자기 스스로 세계 경찰역할을 한답시고 도둑이 도둑을 잡는 무법천지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었다. 미국은 중국의 배 '인허하오'가 중동의 어느 국가에서 금지된 화학품을 운반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는 구실로 배를 끌어다가 강제로 그들의 검문에 응하게 하였다. 이때 '인허하오'가 검문을 거절하였다면 전세계는 즉각 중국인이 나쁜 짓을한다며 시끌시끌했을 것이고,거꾸로 '인허하오'가 검문에 응한다면 전세계에는 미국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없으며 미국이 못할 일이 없다고 설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그들의 동기는 지나치게 사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인허하오'를 철저히 까발려 본 후 전세계에 이 사실을 알렸던가?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중국이 뒤집어쓰고 있던 누명을 씻게 하였던가? 미국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미국은 국제관계에서 항상 독단적이고 그 속셈이 사악하며 위선적이고 책임을 지지 않는 가증스런 모습을 드러내는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지닌 몇 가지 기본적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16억 불이나 되는 유엔회비조차도 납부하지 않는 나라이다.최근 어느 의원이 이 빚을 갚으라고 종용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유엔에서 자기 마음대로 이런저런 안건이나 성명을 꾸며내고 유엔의 힘을 빌어 전세계를 호령하려 들고 있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을 겨냥하여, 일정한 기한까지 유엔회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회원국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는 안건을 제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유엔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불공정한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용감하게 수행해야 하며, 강대국이 힘만 믿고 유엔을 빌미로 자국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타국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부결권을 행사해야할 것이며 과감하고도 큰 소리로 'No'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썩지 않는 고무신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땅 속에 파묻혀 있다. 낮이면 맑은 햇살,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온몸에 맞고 싶고, 밤이면 따스한 별빛 한번 바라보고 싶어도 컴컴하고 습기찬 이곳 흙 속에 파묻혀 있다. 이제 나와 함께 파묻힌 것들은 모두 다 썩어 버렸다. 내가 사랑하던 소년의 노트도, 일기장도, 책가방도, 어머니한테 쓴 편지도 이제는 모두 썩어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 나는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그 소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 소년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80 년 5월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발에 신겨 있었다. 소년은 수업을 일찍 끝내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년은 논둑 옆 개울가를 걷고 있었고, 마을에는 손에 총을 든 군인들이 진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 땅에 또다시 악독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야, 우리 개구리 잡으면서 놀다 갈까?" 소년의 친구가 소년에게 말했다. "개구리가 불쌍하다. 우리 종이배를 만들어 띄우자." 소년들은 개울가에 앉아 종이배를 만들었다. 나의 소년은 허드레 연습장 종이로 만든 종이배를 띄웠고, 다른 소년들은 영어나 수학 시험지로 만든 종이배를 띄웠다. 소년들은 우르르 종이배를 따라갔다. 종이배는 온몸에 햇살을 가득 싣고 기우뚱기우뚱 거리며 흘러갔다. 나는 신이 났다. 나도 종이배를 따라 푸른 바다로 흘러가고 싶었다. 총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느닷없이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총소리에 파묻혔다. 소년들은 냅다 뛰었다. 나의 소년도 얼른 논둑길로 뛰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발에서 벗겨졌다. 순간, 소년이 나를 뒤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즉시 나에게 향해 달려왔다. "돌아가!"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잘못하면 죽어! 돌아가란 말이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년은 나의 고함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 총알 하나가 소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은 그때였다. 개울가에 벗겨진 나를 막 주우려는 순간, 소년은 "아!"하는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푹 거꾸러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개울가에 앉아 나를 안고 통곡했다. 군인들이 마을을 떠난 뒤, 나는 소년의 책가방과 함께 개울가에 파묻혔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 소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만은 아직도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소년이 이 땅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썩지 않았다. 기다림은 우리를 썩지 않게 만든다. 글터 → 이글저글 나폴레옹이 만들어낸 성녀 잔다르크 그녀는 1412년 도므레미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프랑스 왕실의 관할령이 아닌 자치주였다. 따라서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19세기까지 영웅으로 불리지 않았다. 죽은 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금방 사라져서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전설에서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18세기 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을때 나폴레옹은 프랑스 민족주의를 고양시킬수 있는 상징적인 영웅이 필요하였고 잔다르크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성인들의 대열에 들어간 것도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나폴레옹의 이력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은 16세에 프랑스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되었고, 24세에 툴롱 반도의 진압에 무훈을 세워 소장이 되었다. 26세에는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하였고, 33세에 종신 통령에 임명되었으며, 35세에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인간의 역사 3500년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겨우 230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3270년 동안은 계속 전쟁속에서 살아온 셈이다.BC1300년경 이집트의 왕 메네프타는 리비아아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카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승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리비아군 13,000명의 음경을 잘라 전리품으로 갖고 왔다.징기스칸은 니샤푸르에서 한 시간에 1,748,000명을 죽였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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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맘도 그러면 좋으련만.</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