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5호 2023.5.24 수요일 (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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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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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신선한 달걀로 남을 수는 없다. 병아리로 부화되든지 곯든지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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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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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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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다리, 얇은 허리
‘두꺼운 다리가 고민이라면? 여름이 다가오면서 두꺼운 다리로 고민하시는 여성분들’ 지하철역 주변에서 받은 광고지에 쓰인 문구다. ‘단순히 허리가 얇은 게 아닌, 팔의 길이나 유연성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신문 기사의 일부다. 사람 다리가 두껍거나 허리가 얇을 수 있을까?
‘두꺼운 다리’ ‘얇은 허리’는 ‘굵은 다리’ ‘가는 허리’로 써야 한다. 두껍거나 얇은 것은 종이나 책, 헝겊 등이고 우리 몸통이나 팔다리는 굵거나 가늘다. 포털에서 ‘두꺼운’을 검색해보니 자동완성 기능으로 추천해 주는 말에 ‘다리 두꺼운 여자’ ‘발목 두꺼운 사람’등이 딸려 나왔다. ‘얇은’을 검색하려고 ‘얇’이라고 치자 기다렸다는 듯 ‘종아리 얇아지는 운동’ ‘허벅지 얇아지는 운동’ ‘얇은 머리카락’ 등이 검색어로 자동 추천되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굵다’ 대신 ‘두껍다’를 ‘가늘다’ 대신 ‘얇다’를 쓰고 있다는 말이다.
‘굵다, 가늘다’는 길이를 가진 사물의 둘레가 어떠한지를 나타낼 때 쓴다. ‘두껍다, 얇다’는 부피가 있는 물체에서 앞뒤나 위아래 면 사이가 먼지 가까운지를 표현하는 말로, 보통 길이가 긴 사물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사람의 허리나 팔다리, 발목, 손가락 등은 모두 어느 정도의 길이가 있으므로 이것들의 둘레를 표현하는 말은 ‘굵다, 가늘다’이다. ‘굵은 팔뚝, 굵은 허벅지, 가는 손가락’ 등으로 쓴다. ‘머리카락’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길이가 긴 것이므로 ‘얇은 머리카락’ 대신 ‘가는 머리카락’으로 쓰는 게 맞다. 사람의 외모를 묘사할 때는 입술만 ‘두껍다’ 또는 ‘얇다’로 표현하고 나머지는 모두 ‘굵다, 가늘다’로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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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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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치도 없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북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 그림자가 소리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근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퉁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을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게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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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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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4. 해는 중천에 뜨는 그 순간부터 기운다(주아부)
주아부는 주발의 아들로서 군사 작전에 뛰어나고 군율이 엄하기로 유명했다. 기원 전 158년 흉노가 대규모로 한나라에 쳐들어 왔다. 이에 문제는 주아부를 비롯한 세 장군을 파견해 패상과 극문, 그리고 세류 지방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때 주아부는 세류의 방어를 맡게 되었다. 세 장군을 파견한 후 문제는 친히 일선으로 가서 병사들을 위문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패상과 극문 지방에 갔는데 황제가 탄 수레가 곧장 성문으로 달려들어 갔지만 누구 하나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장군 이하 모든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나와 환영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다음으로 세류의 주아부 군대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모든 병사들이 갑옷을 입고 손에는 서릿발 같은 칼과 창을 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화살이 겨냥된 채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윽고 문제 일행의 선발대가 성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의 경비병은 그들을 막아서며 결코 들여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선발대의 한 사람이 엄숙한 목소리로,
"폐하께서 곧 도착하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비병은,
"장군의 명령이 '군중에서는 장군의 말만 들을 것이며, 설령 폐하의 명령이 있더라도 듣지 말라'고 하셨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뒤 바로 문제의 행차가 도착했는데, 역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문제는 정식으로 사자를 장군에게 보내,
"짐이 오늘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노라."하고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아부는 비로소 성문을 열어 황제 일행이 통과하도록 허락했다. 행렬이 군영으로 들어서려는데 수문장이 호위 군관에게 이렇게 귀뜀해 주는 것이었다.
"장군이 정한 규정에 의하면 군영 안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호위 군관이 황제에게 이 사정을 말하니 황제는 말이 천천히 걷도록 말고삐를 느슨히 하였다. 드디어 황제가 본부에 도착해 보니 주아부 이하 모두가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히 늘어서 있었다. 주아부는 황제를 보자 두 손을 모아 눈 높이로 들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몸에 군장을 차렸을 때에는 절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뵙는 것을 양해해 주소서."
이에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나중에 황제가 성문을 나서자 황제의 수행원들이 모두 주아부가 한 행위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그 정도라야 비로소 장군이라 할 수 있다. 패상이나 극문이야 아이들 장난이지 그게 어디 군대 꼴인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군기가 엄한 군대를 세류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주아부를 크게 신뢰하여 태자의 앞날을 부탁하며 말했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겨도 주아부라면 군대를 통솔하여 막중한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그를 거기장군에 임명하였다.
도전은 있으되 응전은 없다
그 후 오, 초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주아부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때 주아부가 황제에게 말했다.
"지금 반란군은 사납고 빨라서 정면으로 맞선다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양나라 땅을 잠시 내 준 다음 저들의 보급로를 끊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아부는 병사들을 형양 땅으로 집결시켰다. 당시 반란군은 양나라 땅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양나라는 위기에 빠지자 주아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주아부는 못 들은 척하며 군대를 양나라에 못 미친 곳에 머물게 하면서 튼튼하게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양나라 지방에서는 날마다 사자를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주아부는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제에게 직접 글을 올려 호소하였고, 이에 황제도 양나라 지방에 구원병을 파견하라고 주아부에게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아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아부는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 날랜 기습 부대로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그 후 보급로가 끊겨 굶주림에 시달린 반란군은 사력을 다해 싸움을 걸어 왔다. 하지만 주아부는 맞서 싸우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병사들 중 일부가 크게 소란을 피우며 떠들어 댔지만, 주아부는 장막 안 침상에 누워 잠을 자면서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 잠잠해졌다. 그 뒤로도 반란군은 매일같이 공격해 들어왔지만, 주아부는 명령을 내려 절대 응전하지 말도록 했다. 반란군은 정예 부대를 투입해 성벽을 허물어뜨리려 했지만, 철통같은 방어벽을 결코 뚫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 봐도 성과가 없자 반란군은 이제 제 풀에 지쳐 철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이제까지 그토록 맞서 싸울 생각도 하지 않던 주아부가 전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굳게 닫혔던 성문을 열고 한꺼번에 몰려나가며 반란군을 포위해 들어갔다. 삽시간에 반란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당했다. 주아부는 그 여세를 몰아 반란군을 끝까지 추적해 궤멸시켰다. 이때 반란군의 총소이던 오나라 왕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양자강 남쪽의 단도현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렇게 하여 반란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실로 오, 초 7국 반란의 진압에 있어 주아부는 일등 공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아부는 그 공로로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 후 황제가 세상을 뜨고,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경제였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정상에 올라간 주아부의 내리막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주아부는 자신을 과신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오, 초 7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난 후 그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한나라 초기에 왕조를 흔든 2대 사건으로 여씨의 전횡과 오, 초 7국의 난이 있었는데, 주아부와 그의 아버지 주발이 각각 이 위기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아부는 자기들 부자가 아니었으면 한나라가 망했으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주아부가 황제에게 간섭하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율희의 아들을 태자에서 폐위시키려는 경제의 생각에 주아부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경제의 부인인 왕부인의 오빠를 제후로 임명하려 할 때도 격렬히 반대했다.
"고조(유방)의 말씀에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공적이 없는 사람은 제후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자 경제는 매우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를 제후로 임명하지 못했다. 그 뒤 흉노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여섯 명이 한나라에 투항해온 적이 있었다. 경제는 흉노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그들을 제후로 임명하고자 했다. 이때 주아부가 나서서 말했다.
"그 자들은 자기 군주를 배신하고 투항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제후로 우대한다면, 폐하께서는 장차 신하들이 배신할 때 어떻게 비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제는 주아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이에 주아부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병을 핑계삼으며 조정 회의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해임되었다. 그 뒤 주아부는 아버지 주발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상방이라는 곳에서 갑옷과 방패 5백 개씩을 사들였다. 무덤에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원래 상방은 궁궐에서 쓰는 물건만 만들던 곳인데, 주아부가 이를 어긴 것이었다. 그래서 주아부는 조사를 받게 되었고 그는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제가 이 소식을 듣더니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며 바로 정위에게 넘기도록 명령했다. 이에 주아부는 자살하려고 했지만, 아내가 극구 말렸다. 주아부는 그 뒤 정위에게 끌려가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단식하다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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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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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雁書)
雁:기러기 안. 書:글쓸/편지/책 서.
[동의어] 안찰(雁札), 안신(雁信), 안백(雁帛).
[참조] 인생조로(人生朝露). [출전]《漢書》〈蘇武專〉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가 먼 곳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일컫는 말.
한(漢)나라 소제(昭帝)는 19년 전, 선제(先帝)인 무제(武帝) 때(B.C. 100)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억류당한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의 귀환을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현지에 도착한 특사가 곧바로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에게 소무의 석방을 요구하자 선우는 ‘소무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었다’며 대화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상혜(常惠)라는 사람이 은밀히 특사의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무를 따라왔다가 흉노의 내란에 말려 일행이 모두 잡힌 뒤 투항한 사람 중하나요. 그런데 그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소무는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당한 뒤 아직도 그곳에서 혼자 어렵게 살아가고 있소.”
이튿날 특사는 선우를 만나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께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소. 그래서 풀어 보니 ‘소무는 대택(大澤:큰 못)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소. 이것만 봐도 소무는 살아 있는 게 분명하지 않소?”
안색이 변한 선우는 부하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잘 모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그는 살아 있다고 하오.”
꾸며댄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며칠 후 흉노의 사자(使者)가 데려온 소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부절(符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 고사에 연유하여 그 후 편지를 안서라고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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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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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농자천하지대본 - 이진숙(여.서울 노원구 하계동)
안녕하세요. 어렵게 살던 어린시절, 저희 친정 아버지는 잘 먹는 사람을 좋아하셨지요. 근데 자식이라곤 저와 남동생 단둘인데, 우린 둘 다 약골이었어요. 잘 먹지를 못했거든요. 끼니 때마다 밥상을 놓고 고사를 지내는 우리 남매에게 울화가 치민 아버진 툭하면 당신 베개를 내던지시곤 하셨지요.
"왜 푹푹 안 퍼먹냐 인석들아 엉!"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진 우리에게 식전 막걸리 한 잔씩을 먹이셨지요. 술기운이 돌면 식욕이 좋아져서 밥을 잘 먹을 수 있다시더라구요. 그것은 베개 던지시는 것보다 효과가 있었죠. 문제는 아침부터 취해서 학교에 간다는 거지만요.
어느 날은 제법 취기가 올라서 교실에 앉아있는데, 교실 전체가 뱅 그르르 돌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수업 2교시까지 취해서 책상에 누워만 있었어요. 막걸리는 그만 먹을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셨습니다.
"그깟 공부가 밥을 멕여주냐? 옷을 주냐? 그저 건강이 최고랑께."
그래서 우리 남매는 매일 삼시 세 끼마다 강제로 반주를 한 잔씩 했습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한번은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왔는데 한참을 놀다보니 배가 고프더라구요. 먹을 걸 찾으니 있어야지요. 그래서 라면 몇 봉지를 외상으로 사다가 끊였습니다. 상을 차리다 보니 막걸리 생각이 났어요. 친구들에게 우리집 식사문화를 말했더니, 모두들 한 잔씩 걸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한 잔씩 마셨는데 그만 친구들이 뻗은 거예요. 뒤늦게 친구부모님들이 이 사실을 알고 집단으로 몰려와 우리 부모님께 자식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호통을 치셨는데, 우리 아버지 눈 하나 깜짝 안하시고 이러시더군요.
"아따, 똑같이 먹구 우리 아인 멀쩡한디, 나자빠지긴...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도 있소. 막걸리 한 잔쯤이야 끄떡 안하는 장사로 키울 생각은 않구..."
하여튼 아버지의 갖은 노력으로 우리 남매는 점차 튼튼한 체력의 소유가가 되긴 했습니다. 막걸리도 더 이상은 마시지 않아도 되었구요. 하지만 막걸리와 저는 피하려해도 피할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저는 농과대학을 다녔어요. 근데 농과대학에서는 '농자천하지대본'을 내세워 농자는 맥주도 아닌 그렇다고 소주도 아닌 막걸리를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막걸리를 퍼마시게 하는데 막걸리엔 이력이 붙은 저인지라 주량이 대단했어요. 사발로 열 잔쯤은 문제도 없더라구요. 근데 막걸리 마시는 제 아름다운 모습을 은밀히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지요. 2학년 선배였어요. 그가 술의 'ㅅ(시옷)'자만 들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알코올 알레르기 환자였기에 제가 아주 근사해보였나봐요. 우리는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답니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학교앞 주점이었는데 그는 따르고 저는 마시고, 그가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면 제가 입을 벌려 먹는 식이었지요. 제가 워낙 마시는 편인지라 저만 가면 그 술집 아주머니는 엄청 좋아하는 겁니다. 무척이나 반기셨죠. 근데 나중에 듣자니 그 아줌마가 글쎄 저를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로 알았다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잘되어 나갔지요.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남자가 요핑게 조핑계를 대며 미구라지처럼 살살 바져나가는 겁니다. 소문에 듣자니 더블 데이트라는 걸 하더라구요. 괴로운 마음에 마셨습니다. 락카페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소주방에서 소주칵테일도 마셨어요. 물론 완전히 갔지요. 그에게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내 목소리가 이상하다구. 끄윽-. 좀 마셨지. 막걸리 1차,맥주 2차,소주 3차... 주태백이 이진숙도 취할 날이 있구려. 더블 데이트를 하신다구요? 끄윽-. 나는 일부일처제 나라의 국민이올시다. 끄윽-."
그러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진숙아 제발 좀 그만해! 이거 스피커폰이야. 우리 식구 모두 모여 네가 하는 소릴 듣는다구.."
끝이었습니다.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 누가 주정뱅이 여자와 교제하는 걸 허락하겠어요. 이튿날 그가 조용히 저를 불러냈습니다.
"할말이 있어. 우리 아버지가 며느리 될 여자 주량 구경 좀 하잰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시아버지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맹세했다. 그리고 그 맹세는 지금까지 지켜져 오고 있습니다. 안주거리 될 만한 게 상 위에 오르면 시아버님은 제게 술 한 잔을 권하세요. 그 재미로 저는 매일 매일 안주도 되고 반찬도 되는 걸 선정하느라 고심하지만 나날이 늘어만 가는 주량 속에 행복이 솔솔 익는 냄새... 괜찮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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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3장 그리스의 태초 신들
5. 크로노스
크로노스(Cronus, Saturn)는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이자, 제우스의 아버지다. 크로노스의 형제자매를 티탄족이라고 하지만 티탄족에 관한 이야기는 태곳적 일이어서 전해오는 것이 별로 없다. 크로노스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는 많은 자식들이 태어났으나 우라노스는 자기의 아이들에게 권좌를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대지(가이아) 속에 가둬 버렸다. 가이아는 가증되는 부담을 참을 수 없어 가장 용맹한 아들 크로노스를 부추겨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키기로 계획하고, 그에게 작은 낫을 주어 우라노스가 그녀에게 접근할 때 거세하게 하였다. 이 때 우라노스가 땅에 흘린 핏방울에서 복수의 여신 푸리아이(에리뉴에스)와 거인족인 기간테스가 나타났고, 잘린 성기를 바다에 던지니 거품에 쓸려가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참패한 우라노스는 승리자인 아들에게 '너도 앞으로 네 아들에게 찬탈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이 경고를 들은 크로노스는 자신의 권좌를 보장하기 위해 아내 레아가 낳은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를 태어나는 대로 모두 삼켜버렸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으로 때를 의미하는 Chronos와 혼동되는데 이는 시간이 자신이 생산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데서 온 것이다. 또한 크로노스의 어머니 또는 배우자라 하는 레아는 시간과 운명이 화신한 여신이다.
크로노스로 인해 상심한 레아가 가이아와 의논하니, 가이아는 다음 아들을 낳으면 크로노스에게 아들 대신 돌을 주어 삼키게 하도록 일러주었다. 레아는 가이아의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 무사히 아들을 안전한 장소에 숨기니, 그 아들이 바로 제우스였다. 제우스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자 레아는 크로노스에게 이젠 걱정 말고 아이들을 토하도록 설득하였고, 크로노스는 이에 동의하여 우선 제우스 대신 삼킨 돌을 토하고 이어 그 밖의 모든 자식들을 토해 냈다. 이후 크로노스는 제우스를 위시한 아들 세대와 장장 10년에 걸쳐 거신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많은 티탄들은 크로노스 쪽에 가담하였으나 큐클로페이스와 헤카톤케이레스의 도움을 받은 제우스와 그 형제들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제우스는 패배한 티탄족을 지하의 타르타로스에 가두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올림포스에서 통치를 하였다. 제우스에게 권좌를 빼앗긴 크로노스는 로마로 가서 그곳을 통치하였는데 그의 치세 동안은 평화롭고 행복한 황금기였다고 한다. 크로노스는 태곳적에 곡물의 신이었던 듯하며, 아테네와 테베 및 로도스 섬에서 그를 기리는 크로니아 추수제가 열렸는데 사람이 희생물로 바쳐졌다. 천문학에서는 태양계에서 목성 다음으로 큰 행성에 그의 이름을 붙여 토성(Saturn)이라 부르고 많은 위성을 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레아
레아(Rhea, Terra, Ops, Cybele)는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 태어난 여신이다. 본의 아니게 크로노스의 아내가 되어 헤스티아.데메테르.헤라. 하데스.포세이돈 및 제우스를 낳았다. 그런데 크로노스는 그녀가 아이를 낳는 즉시 삼켜버렸는데 이는 아들 중 하나가 신권을 찬탈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레아는 남편의 이 무자비한 행위에 대해 부모에게 호소를 하였고, 이내 그로부터 방법을 일러 받았다. 즉 아이를 낳자마자 곧 감추고 대신 돌을 포대기에 싸서 넘겨주었던 것이다. 물론 크로노스는 이 돌을 아이로 알고 삼켜버렸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불안은 얼마 안 가 적중하였다. 레아가 숨긴 그 아이는 자라나면서 힘이 장사요 세력이 강해져서 제우스라 불리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아비의 신권을 찬탈했던 것이다. 레아는 학자 간의 견해 차이에 따라 다른 많은 여신과 동일시되고 있으며, 특히 로마신화에서는 보나 데아, 큐벨레, 딘듀메나, 마그나, 마르테르 크레스, 베스타, 티타이아, 테라, 텔루스 및 옵스로 불렸다. 권좌를 찬탈당한 크로노스는 후에 이탈리아로 가서 왕국을 세우는데 레아도 그를 뒤따라가서 크게 인정 받게 되었다. 이 시대를 흔히 크로노스의 황금시대 혹은 레아의 시대라고 부른다.
6. 테미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테미스(Themi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이며 티탄족으로서 제우스의 첫 배우자이다. 소생으로는 호라이, 모이라이, 아스트라이아(낭자 별자리)가 있으며, 에리다노스강 요정의 어미, 때로는 헤스페리데스도 그의 딸들이라 한다. 테미스는 티탄족 중 올림포스 신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 여신이며 우라니아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가이아로부터 전수받은 예언술에 능하여 아폴론 이전에 델포이 신탁소를 열고 아폴론에게 예언술을 전수하였다. 한 번은 제우스가 요정 테티스를 연모하여 결혼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소생으로 아들이 생기면 힘으로 아비를 축출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을 들은 제우스는 테티스를 영생할 수 없는 인간 펠레우스와 맺어주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트로이 전쟁의 초고 용사 아킬레스이며, 과연 제우스와 연결되었더라면 신의 세계를 뒤흔들 만한 인물이었다.
테미스는 신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연회를 주관하며 신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였다. 레아가 아들 제우스를 낳자 은신처에 보내 아비 크로노스의 감금에서 모면케 한 것도 그녀이며,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미 레토가 난산으로 고생하는 것을 돌보아 순산을 돕기도 하였다. 델포이 신탁소는 아폴론에게 이양해 주었다. 지상에서의 그녀의 지배영역은 매우 광대한데 특히 무엇보다 정의의 수호신으로 존숭받았다. 즉 신의 법적 권리를 인준하고 인간에게는 올바른 사람을 지켜 주며 죄를 벌하고 사회질서와 정의를 실현시키는 의인신이었다. 따라서 정의를 지켜준다고 하여 소테이라(보존신)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범죄에는 응분의 벌을 내렸으므로 판결을 내릴 때는 이 테미스 여신의 이름으로 내렸다. 신탁은 여신의 은혜로 신의 의지를 어림잡아 풀이하여 인간에 전해졌으며, 미증유의 대홍수를 모면한 데우칼리온에게 사람이 다시 지상으로 모이게 하는 방법도 전해주었다.
여신숭배는 그리스 전역에 보편화되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도 여신의 신전을 봉헌하였고, 그밖에 트로이젠, 타나그라, 올리피아 및 테베에도 성역이 있었으며 제우스와 같이 숭배되었다. 흔히 여신은 준엄한 외모를 지닌 부인상으로 표현되며, 양 손에 들고 있는 저울과 칼을 법질서와 정의수호의 정확성과 엄격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1636), 페테르 파울 루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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