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역사 - 조르주 장
제6장 문자해독자 (1/3)
몇몇 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상형문자, 설형문자, 그리고 크레타 선문자의 비밀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해독 불가능한 문자를 해독해 낸 그들은 문자언어의 비밀왕국을 파헤친 보물 추적자들이었고, 그들의 성공으로 마침내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현대세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문자를 누가 창조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회계사, 필경사, 습자선생 등 익명의 대중들이 만들어 냈다. 예부터 이들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문자를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돌이나 진흙판 위에 새겨진 애매한 기호를 해독하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학자들은 시대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서 동시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선구적이고 가장 영감에 가득 찼던 사람은 상형문자를 해독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일 것이다. 설형문자가 해독된 것도 아마 거의 같은 시기일 것이다. 베아트리스 앙드레 레크남은 이렇게 썼다. "수메르라는 이름은 2000년 이상이나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체계가 수메르의 페허에서 나올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크레타 선문자B는 1956년에 사망한 마이클 벤트리스에 의해 1950~1952년 사이에 해독되었다.
짧지만 충만한 생애 샹폴리옹은 1804년 그르노블의 왕립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상형문자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콥트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곧 콥트어가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최근 형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822년 파리에 있는 프랑스 문학학술원의 종신서기인 앙드레 다시에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고대 이집트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직책, 이름, 성을 써 넣는 데 사용한 음운 알파벳에 관한' 이론을 설명했다. 그샹폴리옹은 곧 그것을 로제타 스톤의 해독에 원용함으로써 그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는 1824년에 (고대 이집트인의 상형문자체계에 대한 개요)라는 저서를 내놓았고, 1828년에는 예술가 네스토 로트와 함께 이집트 탐사여행을 떠나 탐사의 단계별 기록을 일기에다 깨알같이 기록했다. 그러나 샹폴리옹은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과로로 사망했다. 42세였다.
로제타 스톤이라고 알려진 돌기둥은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발견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동쪽, 나일강의 서부지류에 위치한 라시드항 부근에서였다. 그것은 B.C. 196년에 제작되었다. 당시 열두 살 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왕을 기리는 칙령을 그리스어로 만들어 돌에다 새겨 넣은 것이었다. 텍스트는 그리스어로 쓰여졌지만, 그에 앞서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새겨져 있었다.
로제타 스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정복을 놓고 다투던 시절인 1801년 영국인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샹폴리옹은 1808년에 파리에서 로제타 스톤의 탁본을 구해 여러 해동안 연구했다. 그는 상형문자로 쓰인 텍스트에는 두 개의 타원형이 있으며, 테두리 속에 들어 있는 이름은 그리스어 텍스트에 나오는 크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모든 상형문자는 표의기호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샹폴리옹은 놀라운 직관력을 발휘하여 로제타 스톤 속의 기호는 사물뿐만아니라 소리도 나타낸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콥트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타원형 테두리 장식 속에 들어 있는 기호의 의미를 해독해 낼 수 있었다. 로제타 스톤을 읽으려면 사자의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 그는 타원형 테두리 장식 속에 들어 있는 텍스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반적으로 상형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지만 사자의 시선이 특별한 안내역을 맡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크레오파트라의 이름을 다른 돌에서 읽어 냈다. 로제타 스톤의 맨 윗부분에 적혀 있던 크레오파트라의 테두리 장식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잘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그는 나머지 텍스트를 해독할 수가 있었고, 상형문자가 표의기호뿐만이 아니라 표음기호로도 구성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정립했다. 설형문자의 해독으로 가는 대장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추리소설처럼 아슬아슬하다. 설형문자의 해독은 1800~1830년 사이에 여러명의 학자들이 고대 근동의 문자를 발견한 것에서 시작된다. 괴팅겐 대학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는 자신이 페르세폴리스에서 나온 문자를 해독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후 라스무스 C.N. 라스크, 유젠 뷔르누프, 크리스티앙 라센, 특히 헨리 크레스윅 롤린슨 같은 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했다. 페르시아의 베히스툰에 있는 한 암벽에서 롤린슨은 샹폴리옹이 로제타 스톤을 대했을 때와 같은 어려운 문제와 만났다. 에드윈 노리스는 두 번째 기둥이 엘람어라는 것을 알아냈다. 롤린슨을 포함한 다른 학자들은 세 번째 기둥의 해독에 도전했는데 마침내 1851년에 세 번째 기둥의 112줄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셈어인 아카드어로 쓰여 있었다.
1857년 런던에 있는 왕립 아시아 학회는 최근에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을 네 명의 아시리아 학자인 롤린슨, 에드워드 힝크스, 윌리엄 H, 폭스 탤봇, 그리고 율리어스 오페르트에게 보냈다. 서로 상의하지 않고 그 문자를 해독해 달라는 의뢰였다. 한 달 뒤에 그들은 각자 번역문을 제출했는데 본질에서는 모두 똑같은 내용이었다. 1905년 프랑수아 튀로 당쟁은 가장 오래된 수메르 문자의 첫 번째 번역문을 제출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설형문자 해독분야는 조금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계속 발전하였다. 그래서 장 보테로는 이렇게 썼다.
"모든 분야의 역사를 잘 살펴볼 때 1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아시리아 학자들만큼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들인 분야는 없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자그마한 불씨에서 발견과 이해의 거대한 불꽃을 피워 올려 고대문자 해독분야에서 알찬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이분야의 발전은 영원히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던 고대사의 방대한 사료들을 발굴해 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크레타에 남아 있는 세가지 문자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존 에번스 경은 크레타섬의 도시인 크노소스 고대 왕궁의 페허에서 몇 개의 진흙판 조각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글씨 같은 것이 쓰여 있었다. 아주 단편적인 가장 오래된 진흙판에 새겨진 문자는 B.C.2000~16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두 번째 것은 에번스가 선문자 A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B.C.1750~145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직까지도 이 선문자 A를 풀어 낸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에번스는 세 번째 문자를 찾아냈는데 이것을 선문자 B라고 했다. 선문자 B가 쓰인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A를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선문자 B로 쓰인 진흙판은 많이 남아 있다. 에번스는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이 문자를 해독하기 위한 가설과 이론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에번스가 사망하기 5년 전에 한 학생이 그의 과업을 계속하겠다고 맹세했다 1936년 에버스는 런던에서 '이 오랫동안 잊혀 왔던 크레타 문명과 그 부족들이 사용한 신비한 문자체계'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청중 중에는 고대언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열네 살 난 중학생이 있었다. 그 십대 소녀의 이름은 마이클 벤트리스이다. 벤트리스는 이 회의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해독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크레타 문자의 수수께끼를 꼭 풀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선배 학자들에게 열심히 편지로 질문을 했고 마침내 선배 학자들이 실패했던 크레타 문자의 해독에 성공했다. 벤트리스의 업적은 선문자 B를 해독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그리스 본토에 살던 미케네 주민들도 이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해 보였다. 이들 주민은 후에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전설적 주인공들과 동시대인이었다. 마이클 벤트리스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사소한 발견들을 꾸준히 축적해 나감으로써 이 같은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냈다. 그의 친구이며 동료학자인 존 채드윅은 벤트리스의 특별한 재능을 이렇게 말했다.
"벤트리스는 기호의 무질서함 속에서 특정한 상수를 발견해 냈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능력, 이것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높이 사는 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기호가 많이 있다. 벤트리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서른넷에 사망한 이후 많은 연구가 계속되었으나 구체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선문자 A나 파이스토스 원판은 아직도 그 신비가 풀리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야 문자체계의 특정 분이나 이스터섬(세계의 배꼼이라고 일컬어지는 남동 태평양의 칠레령 작은 섬:역주)의 목판에 새겨진 롱고-롱고어는 아직도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명석한 분석력을 발휘해 세계의 기괴한 문자들, 예를 들면 스칸디나비아 룬 문자, 웨일스와 아일랜드에서 널리 쓰였던 켈트 문자체계인 오감 문자 등을 해독해 냈다.
해독되지 않은 문자의 수수께끼, 문자를 발명한 사람들의 재능, 그리고 문자체계를 마침내 풀어 낸 학자들의 천재성은 계속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호 자체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기도 하는데, 기호는 번역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엇인가 얘기해 주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비로 가득한 문자의 역사는 또한 복잡한 변화의 역사이다. 기록하기위해 6000 전부터 발달한 문자는 사색하고 고안하고 창조하고 존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문자는 '언어가 원활한 기능을 수행하자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기록과 증언
글쓰기는 예술과 기술의 경계선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타이포그래피와 서예, 마음을 만족시키는 기호와 상징, 즐거움을 주는 게임, 도발심을 불러일으키는 낙서.
글자와 도시
현대세계, 특히 광고의 홍수 속에서 글자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되었다. 글자는 단어의 덩어리와 의미의 연상에서 자유롭게 되어 그 자체 하나의 시각 경험이 되었다. 서구문명에서 글자는 추상적 재현에서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발전했다. 아래 글에서 로베르 마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투한 '글자그림'의 어지러운 목록을 나열하고 있다. 뉴욕의 대동맥인 브로드웨이와 그 중심지 타임 스퀘어는 글자의 응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42번가에 즐비한 영화광고는 그야말로 빛의 신전이며, 6층 높이의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 메이시의 문자광고도 현란하다. 미국인은 하루에 평균 1500개 이상의 광고를 보면서 돌아다닌다. 무엇보다 시각 이미지가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은 라스베거스이다. 스타다스트 호텔의 거대한 네온 사인은 1만 5000개의 전구를 이용해 작동되고 있다. 사정은 홍콩도 마찬가지이다. 이 도시들은 밤낮없이 문을 열어 놓은 형태와 색채의 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도시는 이름 모를 저자가 집필한 거대한 책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이미지가 스스로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돛대와 기둥과 깃발이 요란한 주유소에는 큼지막한 활자가 인쇄된 광고문구가 햇빛을 받으며 펄럭인다. 졸고 있는 승객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지하철 광고는 어떤가. 달콤한 유혹 같은 광고문안이 잔뜩 붙어 있는 담벼락, 단어를 하늘 높이 날려 보내려는 듯한 애드볼룬, 하늘은 천천히 떠다니면서 광고문구를 수놓는 광고용 비행기. 기둥 형태의 입간판. 거기에 붙어 있는 찢어진 포스터 조각이 오히려 낙서 같아 보인다.
지나간 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잊혀지 기호들.
수퍼마켓 게시판에 백묵으로 써 갈긴 가격표시, 이국적인 글자로 뒤덮인 포장용 궤짝, 유원지에서 벌이는 화려한 쇼, 알록달록한 포스터가 잔뜩 나붙어 있는 식료품 가게의 유리창, 신문가판대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각종 신문, 파리의 약국 창문에 붙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광고문안, 고딕체 음료수광고가 붙어 있는 카페의 창문, 하얀 백묵으로 휘갈겨 쓴 글씨, 가게 바깥의 차양, 싼값에 판다는 세일 표시, 가게 앞면을 큰 글자로 메운 몽땅떨이 세일 광고. 지하실의 싸구려 대매출 가격표시, 색깔이 칠해진 담벼락, 밝은 색상을 자랑하는 집, 히피들의 메시지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탈리아식 부고, 자동차 등록번호, 시가도. 신문, 잡지, 신간서적 내용견본, 소책자, 포스터, 안내자료, 우편문, 전보, 책, 사전, 전화번호부, 논문집, 사용 매뉴얼, 지도, 구인광고, 그리고 연애편지, 팩시밀리 전송지, 만화조각, 토큰, 복권과 지폐, 손으로 쓴 식당 차림표, 서점의 진열장, 그리고 계속된다. 부동산 중개업소 입구의 유리창, 움직이는 네온 사인, 번쩍거리는 글자, 네온 사인을 타고 기어 올라가거나 기어 내려오는 글자, 광고로 도배한 것만 같은 자동차들, 샌드위치 맨, 화려한 쇼핑 백, 이 모든 것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화물차 차량마다 적혀 있는 알 수 없는 숫자, 계산기 위로 흘러 넘치는 숫자의 파도, 몬트리올에 있는 쿠바 전시관 파괴적이고, 극적이고, 글자가 제멋대로 춤추는곳, 그 환상적인 벽, 마루, 그리고 천장. 가지 많은 나무처럼, 가리키는 곳이 많은 이정표, 길 위로 낮게 드리운 플래카드, 일부는 집의 현관이나 박공에서 내결린 것도 있고, 뒤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온 것도 있으며 빈 공간을 색깔로 가득 채우면서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애쓰는 것도 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경고표시들이 있다. '비상구' '경찰' '대기' '주차하지마시오(일요일이라 퍼레이드가 있을 예정)' '출입금지' '광고 부착금지' 이것들말고 손이나 눈의 동작을 가리키는 표시도 있다. '밖으로' '안으로' '위로' '아래로' '당기시오' '미시오' '신분증 제시'
[프랑스 북디자이너 로베르 마생]
글쓰기의 의미
기록 수단, 문자의 도입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문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문자가 바꿔 놓은 역사의 흐름은 무엇인가? 이오스 소재 성 요한 교회에 있는 서기 2, 3세기경의 그리스 비문. 알파벳과 음절문자의 창조는 기호의 숫자를 급격히 감소시키고 언어를 표기하는 무제한한 능력과 대중이 손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체계를 가져왔다. 카난어 알파벳에서 나온 각종 알파벳이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먼저 퍼졌고 그후 다른 지역에 전파 되면서 빨리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는 문자체계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글자를 깨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고 정치, 경제 관계 사건뿐만 아니라 종교, 역사, 문학에 관련된 내용도 문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문자해독 수준이 진일보하여 문자에 의한 기록범위가 넓어진 것은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그리스에서는 알파벳이 발달하고 교육체제가 잘 정비되어 문자해독자가 곧 성직자라는 사고방식이 깨질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문자는 중앙정부의 발전에 어느 정도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문자가 중앙정부의 권력신장을 촉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자해독률이 높아짐에 따라 투표를 할 수 있는 인구가 늘어났고, 투표제도는 국민이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된 것이다. 아울러 문자해독은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습득의 새로운 방식을 가능하게 했다. 그전에는 방대한 지역에서 입으로만 전해 오던 인간의 지식이 문자로 기록되어 눈으로 면밀히 검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구전과 전승들이 구체적인 수단에 의해 조직적으로 기록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를 읽고 분석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분석에는 인간의 지능과 인식능력이 동원되어야 했는데, 바로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이 음절문자의 체계 내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아주 초기에 개발된 표의문자를 가지고 지식을 축적, 발전 시켰다. 그러나 공동체 내의 많은 사람들이 손수비게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대중적 형태의 문자가 개발된 것은 근동에서 알파벳이 발명된 이후의 일이다. 그후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손으로 쓰인 원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알파벳은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타이포 그래피의 기술
활자가 발명된 순간부터 형식과 내용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형식은 인쇄된 책이고 내용은 책에 적혀 있는 글이었다. 2세기 동안 타이포그래퍼의 역할은 미미했다. 갈등은 저절로 해결되었다. 19세기부터 타이포그래피의 역동성이 기표와 기의를 통일했다.(기표와 기의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문법 이론에서 나온 용어로 기표는 형식, 기의는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역주) 토리, 뒤러와 다 빈치의 제자 토리는 O(완전한 원)에다가 중세의 학예 7과 (문자, 논리, 수사, 산수, 기하, 음악, 천문:역주)를 가두었고 또 다른 중요한 철자에다가 아홉 뮤즈(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슈네 사이에 난 아홉 자매신:역주)를 표상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학예 7과 아홉 뮤즈를 플래절렛(앞면에 넷, 뒷면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 플릇 같은 목관악기:역주)의 형태 속에다 가두어 넣었다. 이 악기를 앞면에서 원근축소법으로 그려 보면 똑바로 세워 놓은 O와 옆으로 누운I를 겹친 형태가 된다. 이 두 글자는 원과 직선의 만남인데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관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오 여신의 상징 아래에 놓은 이 두글자에서 모든 알파벳 글자가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토리는 눈과 컴퍼스로 생존 당시에 쓰이던 모든 알파벳을 O주위에 배치했는데 이중앙의 O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나온 스물세 줄기 햇빛은 각각 아홉 뮤즈, 학예7과, 4대미덕, 그리고 3대 은총을 가리킨다.
(샹플뢰리)(1529)에서 묘사되고, 주석이 달리고, 꼼꼼하게 검토된 23자 중에서 일부 글자는 자세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A는 "활발하게 걸어가는 남자의 쫙 벌어진 다리"를 가리킨다. A를 가로로 건너지른 빗장은 "정확하게 남성의 성기를 가리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겸손과 순결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좋은 글자 꼴을 얻으려는 사람은 마땅히 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A는 글자꼴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고ABC중에서도 제일 첫째임을 명심해야 한다." 토리는 자와 컴퍼스로 A를 만들었는데 자와 컴퍼스는 왕과 여왕을 나타낸다. D는 "내가 아비뇽에서 본 극장 무대"의 이미지이다. 이무대는 "앞면이 일자이고 뒷면은 반원형이어서 D를 닮았다. H는 "집을 나타낸다. 수평으로 그은 선 밑부분은 (나는 이 수평을 글자의 한 가운데에서 일직선으로 그었다.)아래층에 있는 홀과 방을 나타낸다. 윗부분은 이층에 있는 대연회장과 크고 작은 방을 의미한다." I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여기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문자가모두 신적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호머는 (일리아드)8권의 도입부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제우스는 언젠가 자신이 원한다면 하나의 금줄을 가지고 다른 신은 물론이고 지구와 바다도 자기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만약 금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 발 앞에 멈춘다면 "그 줄의 두께와 균형이 너무도 적절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I의 모형이 되지 않을까?" 금줄이라는 주제는 토리의 작업에 일관되어 있다. 그는 가끔 다른 풍유적 이미지도 활용했다. 가령 황금의 가지 이미지가 그것이다. "황금의 가지는 23개의 잎사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알파벳 23자의 숨겨진 기호"라고 말했다. O의 마지막 이미지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빌려 온 것인데 토리가 그리스, 로마 고전과 이탈리아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토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콜로세움을 천 번도 더 보았다. 파괴되기 전의 콜로세움은 O자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겉은 원형이고 내부는 타원형 이었다." L은 또 다른 비유인 리브라 기호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태양이 천공의 정중앙에 있을 때." 햇빛을 받은 인간과 그 그림자가 결합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M은 그 설명이 평범해 보인다. "이 글자는 너무 뚱뚱하여 허리띠가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긴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이미지는 Q라고 할 수 있다. Q는 모든 글자 중 유일하게 꼬리가 달린 것인데 토리는 이 글자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이 기괴한 글자에 대하여 오랜 생각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Q에 꼬리가 있는 것은 이 글자 하나만 쓰지 말고 좋은 친구인 U와 함께 쓰라는 뜻이다. Q는 친구 U가 늘 자기 뒤를 따라오기를 바라고 또 그 꼬리로 포옹하고 싶어한다." S를 발음해보면 "뜨거운 쇠를 물속에 넣었을 때와 같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지막으로 토리는 Y가 동시대인들의 '허영심'을 표상한다면서 쾌락과 미덕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토리는 나중에 자신의 말이 비판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상모략꾼과 할 일 없는 호사가들이 짖어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예언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수한 학생들에게 기쁨과 도움을 주기 위해" 환상과 공상에 대해 글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토리는 라블레처럼 현학적인 태도를 싫어했는데, 두 사람은 유희정신에서 그리고 유머러스한 언어감각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여기 참고로 (샹플뢰리)첫장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금년은 1523년, 나는 침대에 누워 기억의 바퀴를 굴려서 수천 가지 공상(심각한 것도 있지만 즐거운것도 있다.)을 하고 있다."
"구제주의 공현축일날 아침이다. 나는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했고, 간단하고 맛좋은 음식을 별 힘들이지 않고 소화했다."
"그 공상 가운데에는 내가 한때 도안했던 고풍스런 글자의 기억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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