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감성사전
우박
구름의 진신사리.
거미
노스님 하나가 허공에다 투명한 그늘을 걸어 놓고 하루종일 무념무상에 빠져 있다. 해거름이 되어도 그물에는 하루살이 한 마리 걸리지 않고 새들만 흥건히 노을 속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한 마리 거미만 허공에다 일 점을 찍고 온 우주를 삼키고 있다.
달맞이꽃
밤에만 핀다. 어둠 속에 흩어져 있는 달의 비늘이다. 그리움의 편린이다. 눈 뜨는 사랑이다. 수절 같은 슬픔이다.
파리
인간들에게 가장 싸구려 목숨을 가진 생명체로 취급되고 있는 곤충. 신으로부터 장티푸스, 콜레라, 아메바, 이질 등의 전염성 병원체를 인간들에게 공급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곤충. 여름에 많이 발생한다. 주무대는 주택가의 쓰레기 처리장. 해변의 어물 건조장. 양돈양계장. 재래식 변소. 두엄더미. 동물의 시체 등이 있는 장소다. 잡식성이며 태고 이래로 인간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곤충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조상을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뱀보다도 파리를 더 증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뱀을 죽이는 도구보다 파리를 죽이는 도구가 더 많이 발달해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파리는 비행하는 시간과 음식을 탐닉하는 시간과 명상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오직 간구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두손을 맞부비며 자신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대해 인간들의 오해가 없기를 간절히 비는 것이 생활의 전부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분분의 인간들은 아직 원수도 사랑할 수 없으며 파리도 사랑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파리는 부패의 전령이다. 이 세상 만물들은 반드시 부패하고 거기에서 파리는 태어난다. 이 세상 만물들이 아무것도 썩지 않으면 하나님은 파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파리는 부패를 촉진하고 부패는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촉진한다. 인간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지구에게도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성냥개비
본디는 한 그루 나무였다. 지금은 전신이 억만 갈래로 쪼개져 전생의 업보를 다 털었다. 마지막 희디흰 뼈 하나를 모두 태우고 적멸로 돌아갈 때까지 충혈된 눈빛으로 암송하는 나무관세음보살.
하루살이
하루만에 한 평생을 사는 벌레.
지렁이
지하의 우울한 방랑자. 지상으로 나오면 체액이 말라 질식사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상의 여러가지 동물들이 지렁이를 즐겨 먹는다. 공중을 나는 새들도 지렁이를 즐겨 먹고 물 속을 헤엄치는 고기들도 지렁이를 즐겨 먹는다. 땅 거죽을 기어다니는 개미들도 지렁이를 즐겨 먹고 땅 속을 기어다니는 두더쥐도 지렁이를 즐겨 먹는다. 그러나 지렁이는 절대로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고 다니지 않는다.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고 독침도 없다. 완벽한 비폭력주의자다. 징그러움과 꿈틀거림이 무기라지만 그것으로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먹다가 반만 남겨 놓으면 다시 한 마리의 완벽한 지렁이로 복원된다. 암수 양성을 모두 한 몸에 지니고 있으며 길이가 같은 지렁이끼리 배우자로 삼아 서로 자세를 엇바꾸어 사랑을 나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렁이에게 대지의 창조자라는 찬사를 보낸 바가 있는데 이는 지렁이가 박토를 옥토로 바꾸어 놓는 토양의 마술사이기 때문이다. 지렁이 한 마리가 일생 동안 토해내는 흙의 양은 수만 톤에 이르며 아무리 척박한 산성토양도 기름진 알카리성 토양으로 변모된다. 만약 하나님이 지렁이를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다면 지구가 오늘날 이토록 아름다운 초록별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막
바람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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