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발의 시린 사랑얘기 2/2 : 이외수 수필집 '내잠속에 비내리는데' 중에서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옷을 벗으라니, 옷을 벗으라니, 도대체 이여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순간적으로 나는 몇가지의 해괴한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무슨 부끄러운 추측이냐.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셔야 해요. 이거 내 동생 옷인데 지금 즉시 갈아입으세요."
그녀는 뒤로 감추었던 남자 옷 한 뭉치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아무래도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그녀에게 점수를 1점이라도 더 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옷을 갈아입기로 마음먹었다.
"다 갈아입으셨죠?" 잠시 후 다시 그녀가 방문을 열었다. "이리 나오세요. 그리고 여기 비누와 수건이 있어요. 저기 보이는 길로 곧장 나가면 강이 있어요. 시원하게 목욕하고 오세요."
그녀는 억지로 내 등을 떠다밀었다. 나는 죽어도 목욕하기가 싫었지만 이번에도 1점이나마 더 추가하려는 욕심에서 마지못해 어슬렁어슬렁 강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상하게도 어떤 행복감이 강물 위를 지나가는 바람의 잘디잔 비늘처럼 내 가슴 밑바닥에 반짝이며 쓸려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그때 꼭 3년만에 목욕이라는 걸 해보았었다. 나는 그 맑고 잔잔한 교외의 강물 속에 몸을 담그고 그 동안 개떡 같은 내 청춘의 때를 벗겼다. 벗어지는 때의 밑바닥에는 지금까지 내가 방치해 온 내 자학의 살과 뼈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비로소 신선하게 다시 눈뜨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한 살. 열한 해를 객지에서 보낸 설움의 끝. 다시 살아나는 내 살과 뼈 속으로 강 건너 포플러 숲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가 금빛으로 금빛으로 박혀오고 있었다. 아, 그리고 잠시 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눈시울을 적시는 탕자의 새로됨을 절감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해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여. 사랑이라는 낱말이 아직도 국어사전에 남아 있음을 찬양하라. 아직도 미처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여. 절망하지 말라. 사랑은 모르는 사이 느닷없는 목욕과 함께 오는 것이리니. 시방 나는 설레이는 한 다발의 음악이 되어 한 여자의 곁으로 가고 있다. 나는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좋은 것일수록 더욱 아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연히 한눈을 팔며 짐짓 더욱 느린 걸음으로 가고있었다. 맑은 햇빛, 그리고 조금의 바람. 하늘을 보면 희고 깨끗한 목화구름이 피어오르고, 여린 비행기의 엔진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멀리 논바닥에서 모를 심는 사람들의 구성진 노래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켤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된다 할지라도, 가능하면 그 실수를 향해 차근차근 어떤 작전들을 짜보는 방향으로 나가 볼 결심도 세웠다. 만약 한 여자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정말로 기똥찬 작품을 하나 쓸 수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는 문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동정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장의 비누와 한 장의 수건과 한 그릇의 밥이 단순히 그녀의 장난기 섞인 각본에 의한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무슨 꼴 같지 않은 목욕인가. 그녀의 가슴 속에 그 어떤 자비로움이 있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가문도 별볼일 없는, 그리고 인물도 만고강산인 나를 애인으로 삼을 것인가. 나는 문득 이대로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몸에 맞지도 않는 이 헐렁한 옷을 입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에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제는 바삐 걸음을 옮겨 놓았다. 내가 막 그녀의 집 대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만 숨이 콱 막혀 드는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히면서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의식했다. 바로 내 눈 높이의 허공에 가로놓여있는 빨래 중에는 그토록 거지 발싸개같이 때묻고 남루하던 내 티셔츠며 바지들이 아주 깨끗하게 세탁되어져 햇빛 속에 눈부시게 널려 있었다. 만약 당신이라면 이러한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도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했을 것인가. 나는 그 순간 영원히 빨래가 되어 평생을 그 여자에게 세탁되어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내 곁에 있다. 아내에서 여편네로 전락했지만 우리도 꽃피는 시절은 있었다. 몇 년 동안 소설이 많은 돈과 맞바꾸어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항상 시큰둥한 얼굴이더니, 자기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내 곁에 붙어앉아 잘 좀 봐달라고 갖은 아부를 다 떨다가 두 꼬마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문득 다시 한 번 강에 나가 목욕이나 하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글쓰는 이들의 아내들에게 나는 저 눈이 축복의 눈이 되어주기를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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