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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소리」(시인 길상호) 2009년 7월 15일 |
대청호 가까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분이 있어 함께 꽃차의 재료로 쓸 인동꽃을 따기 위해 나선 적이 있다. 깨끗한 꽃을 찾아 우리는 숲 깊숙이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 보는 길이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선택한 길은 꽃들이 많은 깊은 숲 속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중간중간 차를 세워놓고 꽃을 따는 재미도 좋았지만 도시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즐거운 아침이었다.
한참을 들어가니 시멘트 포장이 끝나고 울퉁불퉁 좁은 비포장길이 이어졌다. 말을 탄 기분으로 그렇게 또 한참을 들어갔는데, 그 깊은 숲 안에 예상치도 못한 넓은 공터가 보였다. 커다란 메타세쿼이아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게 커다란 건물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곳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공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싱싱하고 깨끗한 질경이들이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공간에 닿은 사람처럼 탄성을 지르면서 우리는 질경이를 뜯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준비해 간 비닐봉지들은 질경이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공터 옆으로 내리막길이 있어 내려가 보니 거기는 더 환상이었다. 그곳은 대청호 물가로 주변에는 메꽃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짐들을 한쪽에 풀어 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숫가에서 거닐다 카페 열 시간이 되어 짐도 많으니까 사장님이 차를 가져오기로 하고 나는 그곳에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차 문을 닫고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또 있구나, 생각하면서 호숫가에 앉아 있는데 조금 지나자 여자의 비명 소리, 차 있는 곳에 사장님이 도착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겠지 했는데 그 소리는 조금씩 더 날카롭게, 선명하게 들려 왔다. 좋지 않은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쳐갔다. 방금 전에 들었던 차 문 닫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기까지의 시간 차와, 아침 시간 이 깊은 곳에 누가 들어올 것인가 하는 여러 정황이 끔찍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공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별 생각이 다 교차했다. 이러다 나까지 당하면 어쩌나,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할까, 그래도 나를 공터 쪽으로 뛰게 하는 건 손에 쥐고 있던 과도였다. 질경이를 뜯을 때 사용했던 과도가 나의 비겁한 마음을 간신히 꺾고 있었다.
공터에 거의 닿았을 때 차를 보니 다행히 그 안에는 사장님이 타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나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동을 거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봉고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인상이 좋지 않은 사내 둘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도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려 왔다. 공터 위쪽 숲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내가 차에 올라타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고, 이 비명 소리 안 들리느냐고, 저 사람들 수상하다고 다그치자 사장님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차를 몰았다. 호숫가에 두고 온 질경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가게까지 돌아오는 내내 둘은 봉고차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며 소름이 돋아 있었다.
며칠이 지나 안개가 짙은 아침, 사진을 찍기 위에 나는 카페에서 가까운 호숫가로 내려가 보았다. 멀리 그 공터가 있는 숲의 입구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마을과 가까워 그리 두려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 안개에 갇힌 호수의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그때 들려 오던 비명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발길을 돌려 마을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상했다. 이제는 머리 위 하늘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 사이로 새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동네 어르신께 여쭤 보니 그 비명의 주인공은 왜가리라 하였다. 긴 목을 다 긁고 나와서 그런지 꼭 사람 비명처럼 들린다고. 아, 두고 온 한 무더기의 질경이가 너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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