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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생애 단 한 번」(소설가 정미경) 2009년 6월 5일_스물여덟번째 |
이 비행기는 이미 출발했는데요? K는 발권 코너 남자의 푸른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얘가 무슨 소리야, 시방.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남자가 볼펜으로 티켓에 적힌 숫자를 톡톡 쳤다. 오늘 날짜가 적혀 있고 그 뒤에 0030이라고 적혀 있는 그 부분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이 비행기는 오늘 새벽 0시 30분에 이미 출발한 것이었다. K가 착한 남자랑 결혼한 건 사실이다. 남편은 짧게 한숨을 쉬었을 뿐, 단 한 마디도 힐난을 하지 않았다. 뒤늦은 비탄과 자책으로 10분을 보내고서야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K가 인터넷을 뒤져 더 이상 쌀 수 없다며 의기양양하게 예약한 티켓은 싼 대신, 예약 변경이나 환불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100만 원짜리 두 장. 200만 원이 간단히 사라졌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남자가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번 비행기에 이코노미석이 하나, 일등석이 딱 한 장 남아 있네요. 이후 일주일 동안 한국행 비행기는 남은 좌석이 하나도 없어요. 일등석은 편도에 500만 원입니다. 남자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듯 K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름방학이 막 끝난 주였다. 남편이나 나나 늦어도 모레는 학교에 출근해야 했다. 일주일이나 휴강했다간 알량한 시간강사 자리마저 위태로웠다. 게다가 일주일치 호텔비와 식비를 합하면…. 카드를 내미는 K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탑승구 앞에서 다시 약 5분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K는 혈압이 말썽인 남편에게 일등석으로 가라 했고 남편은 신우염이 채 낫지 않은 K가 그 쪽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서야 K가 떠밀리듯 일등석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고부터 K는 울기 시작했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파산이다. 500만 원으로 할 수 있는, 하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던 것들의 리스트가 태평양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예쁜 여승무원이 울고 있는 K를 내내 지켜보아 주었다. 기내식이 나왔지만, 번번이 손만 내저었다. 뼈가 쏙쏙 저렸다. 내리 세 시간을 울고 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500만 나누기 12는? 시간당 41만6,666원. 벌써 4분의 1이 날아갔잖아. 눈물을 뚝 그쳤다. 앞 포켓에 꽂힌 메뉴판을 꺼내 펼쳐보았다. 트뤼플을 곁들인 프로방스산 치킨. 푸아그라가 토핑된 메로구이. 하몽으로 감싼 멜론. 와인은 그랑크뤼급 2001년 보르도산. 그렇다면 아까 울고 있을 때 눈앞을 오가던, 번쩍이는 은쟁반에 놓인 것들이 평생 소문으로만 들었던 송로버섯과 푸아그라와 기가 막힌 와인이었단 말인가. 울음 그친 걸 귀신같이 알아챈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무얼 좀 갖다 줄까 물어 보았다. 설거지까지 끝난 마당에 밥 달라고 할 수 없어 라면이나 한 그릇 갖다달라고 했다. …얘기를 마치고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물었다. “라면은 먹었어?” “먹었어.” 귀여운 K. 너무 속상해하지 마. 500만 원짜리 라면 아무나 먹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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