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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시인 김기택) 2009년 5월 22일_열아홉번째 |
김과장의 이마와 등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침인데다 에어컨에서 찬바람이 나와 시원해야 할 텐데, 전철 안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열기를 뿜어 대니, 오히려 체온으로 에어컨을 데워 주는 꼴이었다. 사람들이 주위에서 빈틈을 남김없이 조여 오니 숨 쉬기가 거북했다. 승객들은 냉동박스에 든 동태처럼 네모난 모양의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서로 꽉 붙어서 따로 떼어 내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역에 정차해도 덩어리에서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철을 타려고 한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그 덩어리 속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기가 질려 승차를 포기했다. “아유, 저 역에서 꼭 내려야 되는데, 못 내렸어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전동차가 출발한 후에, 누군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 정도면 행복하신 거네요. 나는 벌써 다섯 정거장이나 지나쳤어요. 도저히 내릴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그냥 계속 가고 있는 중이에요.” 여기저기서 와하하하, 키득키득, 낄낄낄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짜증과 불만과 비명과 한탄이 일시에 웃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나도 못 내리고 그냥 가고 있다'는 공감의 웃음도 있는 것 같았다.
김과장은 잔뜩 구겨진 양복을 애써 펴면서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꽉 찬 엘리베이터에 억지로 끼어 탄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출근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오늘도 역시 단골 지각대장 박대리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직원들의 얼굴엔 제각각 덜 풀린 숙취와 졸음과 피곤과 짜증이 그려져 있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박대리가 허겁지겁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오늘은 지각 안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평소보다 10분 일찍 집에서 나왔거든요, 그런데 내리려고 해도 항상 승객이 너무 많아서 못 내리는 지하철역이 있어요. 오늘은 단단히 벼르고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결사적으로 온몸을 비틀며 지랄발광을 해서 겨우 내리는 데 성공했어요. ‘야, 오늘은 드디어 지각은 면했구나.’ 하고 기분좋아서 뛰어가려고 하는데 뭔가 허전한 거예요. 그래서 돌아보니까 내 양복 윗도리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잖아요. 얼른 들어가서 양복을 꺼내는데 전철문이 닫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사방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배가 많이 나온 뚱보 이동보 씨가 한 마디 했다. “저는 오늘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한테 뺨 맞을 뻔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꽉 차서 숨 쉬기 곤란한데, 바로 앞에 있던 여자가 자꾸 도끼눈을 뜨고 날 쳐다보다가 이러는 거예요. ‘왜 자꾸 등 뒤에서 사람을 밀고 그래요!’ 나는 전혀 밀지 않았거든요. 정말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한 마디 했죠. ‘아, 그럼 사람이 숨도 못 쉬어요?’” 숨 쉴 때마다 쑥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이과장의 풍만한 배를 보며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숙취도 졸음도 피곤도 짜증도 함께 배꼽을 쥐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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