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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 흐린 세상 - 도종환 (131)
낮에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는데 저녁에는 밤안개 때문에 시야가 더욱 흐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쟁점 대담을 듣던 택시기사가 얼마나 심한 욕을 해대는지 듣기에 민망하였습니다. 택시기사의 의견에 대체로 공감하기는 하지만 짐승에 빗대어 쏟아내는 욕설과 분노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선배가 식당에서 대통령 욕을 하다 정보기관에 불려가 혼쭐이 나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80년대 중반이니까 20년도 더 지난 일이네요. 이제는 택시기사가 손님이 누군지 의식도 하지 않고 대통령 욕을 하는 일이 평범한 일상사가 되었으니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창 밖의 흐린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는 정치적 독재만 없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30년 이상 지속되던 정치적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시장독재라는 걸 뼈저리게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는 정치를 민주화하는 일에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바친 사람이 많긴 하지만, 경제를 민주화 하는 일에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도 경제부문은 자유화의 길을 걸어가도록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양극화는 심화되고,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졌으며, 고용의 불안정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참여정부 내에서 금융관료들은 고속승진을 했고, 신자유주의적인 금융화가 진행되도록 방치했습니다. 사회전반이 금융수익성에 현혹되게 만들었고 너도 나도 펀드니 투자니 하는 말은 입에 달고 다니다가, 어느 날 금융 권력의 정점에 있던 미국 은행들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면서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보다 두 배 더 잘 살 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던 정부는 마이너스 성장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선진화로 가겠다던 약속은 계속 후진화의 길로 가고 있는 현실로 바뀌었습니다. 경제만 후진화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이 3,4십년 전으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잡는다고 하면서 낡은 가치체계를 억지로 사회전반에 강요하는 생떼를 쓰기도 하고, 편법 증여, 위장전입, 국민연금체납 등에 의혹이 있는 부정직하고 비도덕적인 인사들을 계속 장관에 앉히는 일에 속도전을 내고 있고,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국정원의 정치정보 수집을 강행하겠다고 합니다.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막다른 곳까지 몰린 철거민들을 암적 집단이라고 못 박거나 그들의 죽음을 알카에다식 자살테러라고 공공연하게 몰아 부칩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수사를 해야 할 검찰은 찾아도 나오지 않는 철거민 단체의 금전거래상황을 계속해서 수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자기 자신도 서민인 경찰들은 용역깡패와 나란히 서서 부자들의 개발이익을 지키는 하수인으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선진문명의 시대로 가야할 때에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원로 경제학자인 우자와 히로후미 교수는 이정우 교수와 나눈 어느 일간지 대담에서 "자본주의 각종 제도장치를 시장만능주의 손에 맡기지 말고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공통자본의 주요 요소인 자연환경, 병원, 사법제도 및 경찰 행정 서비스, 금융제도 등을 강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면서도 각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경제체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연환경뿐 아니라 사법제도나 경찰이나 금융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로운 삶을 위해 있어야 하는 것들이고, 무조건 시장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관리해야 할 것들이라고 우자와 교수는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시장가격만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도 그 중의 하나이고 우자와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문화발전과 인간 상호협력과 자연에 대한 존중도 우리가 분명히 지향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돈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입니다. 시장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국가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시장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찰과 검찰과 국가권력이 오직 토목공사의 개발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권이 재벌이나 특정계층의 이익만을 비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재벌의 이익을 지켜주며 성장을 주도하던 관치경제 시대의 폐해와 모순을 우리는 이미 지난 시대에 겪었습니다. 그 길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장만능주의는 시장전체주의로 갈 수 있고, 언제든지 공멸할 수 있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안사회가 아니라는 걸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두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선진화로 가는 길입니다. 시장이 성장을 이끌면서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킬 복지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보다 몇 배 더 잘 살면서도 정직하고 평등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가 지구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북유럽의 여러 나라도 그렇습니다.
국민이 정권을 맡긴 보수의 능력과 수준과 품격이 정말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하고 하고 탄식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설마 그 탄식하는 소리도 홍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며 홍보지침 이메일을 돌리는 이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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