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를 의뢰하려는 이들 중에는 ‘구름 같은 집’의 겉모양에 집착하거나, 집을 지을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정작 설계는 초스피드로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야말로 집을 지을 마음의 준비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집을 잘 지으려면 무엇보다 생각부터 잘 지어야 하는데, 밑바탕도 없이 대뜸 그림부터 그리려는 조급함이 여간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설계를 하는 데 있어 소요 공간의 기능이나 면적 등도 중요한 필요조건이지만 비껴가서는 안 될 본질적인 물음들이 있다. 이를테면, ‘집은 왜 지으려 하는가?’, ‘집을 지어서 무엇을 얻으려(즐기려) 하는가?’등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평소 갖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보기 위해 소설가 유진오의 《창랑정기》나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 또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작품들을 읽어 보았는지 슬며시 묻곤 한다. 물론 읽어 보지 않았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하면서, 이들 작품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집의 진면목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며 제대로 된 집을 위해 어떠한 개념이 필요한지를 내 식대로 풀이해 드리곤 한다. 그렇게 문학을 화두로 삼아 ‘사유의 집’을 함께 그리다 보면 서로의 인연이 어디까지일지를 대략 가늠하게 된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 다소나마 정서적인 교감이 오고가는 경우라야 일을 함께 할 만하다고 보는 것이 내 나름의 일감 선택 방식이다.
수많은 문학 텍스트가 여실히 증거하고 있듯이 집을 제대로 짓는다 함은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의 소중한 인연을 잘 보듬어 이어가고자 함이다. 또한 집을 굳건히 일으켜 세운다 함은 단순히 아름다운 모양이나 풍광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스며들 정신을 구축해 내는 것인 동시에 집주인의 자화상(인품)을 곧바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계에 뜸을 들여가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사유의 집 짓기는 집의 뼈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기초공사나 다름없다. 생각이 부실하면 집 짓기는 형태의 유희로 끝날 공산이 크다. 집 모양이야 건축가에게 맡기더라도 사유의 텃밭만큼은 집주인도 함께 일구어야 한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대지 위에 ‘사유의 집’을 짓는 것! 그것이 바로 건축의 기본이요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