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오스트리아 )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살아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1월 11일 아침, 클림트는 자기 집에서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고 한다. 그의 증세는 잠시동안 꽤 호전되었으나, 스페인 독감이 폐렴에 이르러 결국 2월 6일 아침 6시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고,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죽게 만들 병으로 뇌일혈을 걱정했지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그런 뇌 출혈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었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의 저주였을까?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앗다.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 지었다.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바로 '미치 짐머만'이다. 제목은 희망이지만 마치 해골과 적의를 띤 남성들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듯 하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적어 보낸 엽서들 (가령, "여기는 바르셀로나요. 이 곳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고 난 탓인지, 어제는 당신 꿈을 꾸었소." 같은 것) 만이 남겨졌다. 결국 에밀리 플뢰게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주어야만 했다.
생명의 활력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당시 비엔나는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에곤 실레편에). 당시 비엔나는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엔나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삭할 수 없게 틀어지었다. 비엔나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비엔나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한다.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식민지로 쌓아올린 부와 무너져가는 도덕
클림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식민지 쟁탈과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유럽 대륙이 세계 제일의 문명이자 인류의 미래가 진보해갈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세기인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클림트는 비엔나 대학으로부터 대회랑 천장 벽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법학, 철학, 의학을 주제로 그린 3부작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추상적 패턴을 도입해 복합적이고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엔나의 대중들과 심지어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조차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소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풍문이 좋지 않았던 클림트의 작품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돈, 더 이상 필요없으니 어서 가져가시오!"
클림트는 천장벽화작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작품 제작비 일체를 돌려주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와 창녀, 팜므 파탈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 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다.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마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이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돠어갔다)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다.
『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