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7~80년대의 미국 사회를 목도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의 발전으로 더 풍요롭게 살게 된 사람들이 왜 그 여유를 누리지 않고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지, 왜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에서 도피해 파괴적으로 변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 담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소유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는 삶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물건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꿈꾼다. 어떤 물건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자신의 것으로 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남들이 가진 물건을 자신이 갖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유행에 의해 계속 욕구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소유 지배 형태에 입각한 삶의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것이 에리히 프롬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끊임없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이 나오면 광고를 통해 다시 또 새로운 욕구를 생성해내는 악순환 속에서 결국은 만족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문화를 서구문명이 오래 전부터 세상을 소유양식에 입각해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동양의 시인인 바쇼가 “울타리 곁에 냉이 꽃이 피어있는 것이 보이누나!”라고 있는 그대로의 꽃을 관조하는 것과 달리, 서양 시인인 테니슨이 “꽃을 뿌리 채로 손 안에 들고 있다”라며 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문명은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이해하려하는 접근을 고수해왔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더 좋은 미래, 더 많이 가질 것에 대한 기대 때문에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소유의 삶은, 사람이 실제로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존재적 실존양식은 인스턴트화된 소모적 일회성의 쾌락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무엇을 소유함으로써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존재적인 삶은 현재를 살며 삶 자체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