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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동형을 즐기라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원고가 마무리되셨는지요?’
오늘도 어떤 분에게 원고를 독촉하면서 피동형 문장을 썼다. ‘마무리하셨나요?’라 하면 지나치게 채근하는 듯하여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도 매번 독촉 문자를 받는데 열이면 열 ‘언제쯤 원고가 완성될까요?’ 식이다. ‘원고 완성했어요?’라 하면 속이 상할 듯. 비겁한 피동 풍년일세.
한국어 문장에 대한 가장 강력하면서도 근거 없는 신화가 ‘피동형을 피하라’라는 것. 글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를 한번쯤 들었을 것이다. ‘능동형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피동형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 ‘우리말은 피동형보다 능동형 문장이 자연스럽다’, ‘피동형은 영어식 또는 일본어식 표현의 영향이다’.
‘능동형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철수가 유리창을 깼다’처럼 행위 주체가 주어 자리에 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능동형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한국어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에서 틀렸다. 모든 언어가 능동형이 피동형보다 자연스럽다.
문제는 말글살이라는 게 복잡하고 섬세한 사람살이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행위 주체를 명확히 밝히는 일이 무례해 보일 수도 있고 괜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행위 주체를 모를 경우도 있다. 독자에게 익숙한 정보가 주체보다는 대상인 경우도 있고, 당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싶을 때도 있다. ‘해양생태계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게 ‘일본 정부가 해양생태계를 파괴했다’보다 더 슬플 수 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진실을 감추기 위해 피동형을 쓰는 것까지 감싸고 싶지는 않다. 행위의 주체와 책임을 똑똑히 밝혀야 할 땐 결기 있게 능동형을 써야 한다. 한국어는 능동형도 피동형도 자연스럽다. 피동형을 즐기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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