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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피동의 쓸모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는 특유의 저 말투로 어떤 장면을 실감나게 강조했다. 저래야 영화의 맛이 살았다. 효과 만점. 모든 표현에는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
신화처럼 완고하게 전해오는 명령이 있다. ‘이중피동을 피하라!’ 한 번으로 족한데 두 번이나 피동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정말 그런가? 안 써도 되는데 굳이 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설명을 못 할 뿐이지 쓸모없는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옛말에는 진정한 이중피동, 즉 피동접사를 겹쳐 쓰는 말이 꽤 있다. 예를 들면, ‘닫히이다, 막히이다, 잊히이다, 눌리이다, 밟히우다, 잡히우다’. ‘닫히다, 막히다, 잊히다’ 등은 오래전부터 피동사로 쓰였다. 시간이 흘러 이 말이 피동사인지 아닌지 흐릿해지니 ‘이’나 ‘우’를 붙여 피동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듯, 말도 닳아서 애초의 쓸모가 흐릿해지면 뭔가를 덧댄다. 피동사만으로는 피동의 의미를 나타내기엔 약해 보이니 ‘지다’를 덧붙였다. 장례를 치르는 자식이 육개장을 목으로 넘기며 “이런데도 밥이 먹혀지는군”이라고 할 수 있잖은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불가항력이랄까, 거리감의 강조랄까. 아니면, 변명의 장치랄까.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이용 ‘잊혀진 계절’).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쉽게 쓰인 시, 잊어지지 않는 눈짓, 잊힌 계절’이면 참 어색하다.
사전이나 맞춤법 검사기의 구령에 맞춰 걷지 말자. 나의 감각을 맞춤하게 담을 수만 있다면 어떤 언어도 가능하다. 삶이 그렇듯.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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