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다
‘똑 부러지게 말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흥, 어느 누구도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오. 말의 가장 큰 특징은 모호하다는 것. 정확한 말은 없다. 예컨대, ‘청년’이라는 말은 모호하다. 물론 10살 어린이나 60살 먹은 사람을 청년이라 하지는 않는다. 스무살인 사람은 청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열아홉살은 어떤가. 마흔살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서른살에서 마흔살 안팎의 나이’를 ‘장년’이라고 정의하던데, 그렇다면 청년은 스무살부터 서른살까지? 서른한살은 청년이 아닌가?
모호성은 ‘무지’(모른다)와는 다르다.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있는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아직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줄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뜻일 뿐이다. 생명체가 확인되면 무지는 해결된다. 하지만 ‘청년’에 대해 뭔가를 밝혀본들 모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년에 비해 악력이 더 세다거나 뱃살의 두께가 얇다거나 피가 더 뜨겁다는 게 밝혀진다고 해서 ‘청년’이란 말의 모호성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구체성의 결여’와도 다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양쪽이 노력하기로 했다’는 식의 말이 갖는 문제는 모호성 때문이 아니라 구체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지 말고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조목조목 밝히면 문제가 실질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모호하다’는 말은 명확한 경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은 불분명하고 막연하다. 어디까지가 ‘종아리’이고 어디부터 ‘발목’이 시작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영하 몇도여야 “춥다”고 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말의 의미를 확정 지을 수 없다는 특성이야말로 말의 본질이다. 무슨 수를 써도 말의 모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의 모호성을 밑천으로 굴러가는 인간세상이 헐겁고 시끄러운 건 당연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금쪽이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말이 있다. ‘금쪽이’도 그중 하나.
‘쪽’이란 말은 쪼개진 물건의 일부분, 또는 작은 조각을 뜻한다. ‘대쪽’, ‘반쪽’, ‘쪽잠’, ‘쪽파’, ‘콩 한쪽’ 같은 예에 섞여 쓰인다. 주로 ‘금쪽같은’, ‘금쪽같이’라는 형태로 쓰이는 ‘금쪽’은 작은 조각의 금이다. ‘금쪽같은 자식’뿐만 아니라, ‘금쪽같은 시간, 금쪽같은 기회’에서처럼 금 자체보다는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용도로 자주 쓰인다. ‘금쪽’에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이’를 붙여 만든 ‘금쪽이’는 당연히 ‘귀한 자식’을 뜻해야만 한다! 기왕 귀한 걸 뜻할 바에야 화끈하게 ‘금덩이’나 ‘골드바’라고 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의 뉘앙스로 쓰이니 어찌 된 일인가. 물론 한 낱말이 상황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쓰이는 경우는 흔하다. 예전에 ‘기막히다’가 상황에 따라 긍정적인 뜻을 가질 수도 있고(‘맛이 기막히다’), 부정적인 뜻을 가질 수도 있다고 한 적이 있다(‘기막힌 일을 연거푸 당하다니’). 하지만 ‘금쪽이’는 그런 상황보다는 그 말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반대의 뜻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다르다.
자기 자식에게 ‘금쪽이’란 말을 쓰면 여전히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지만, 남의 자식에게 쓰면 골칫덩어리, 문제아, 말썽꾸러기, 철부지,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이상행동을 하는 어린이를 반어적으로 뜻한다. 유명 육아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으로 보이지만, 이젠 일반화되어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배움이 있어야 할 자리에 폭력이, 갑질이, 사법이 대신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한, 부정적인 의미의 ‘금쪽이’는 사라지지도, 고쳐지지도 않을 것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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