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적
‘연필이 한 자루 있다’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소금이 한 톨 있다’ ‘사람이 한 명 있다’라는 문장들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렇다. ‘1’. 수는 추상화의 끝판왕이다. 숫자가 없다면, ‘연필=강아지=소금=사람’이라는 등식을 상상할 수 없다. 수는 이질적인 것들 속에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공통점을 매개로 새로운 관계로 만든다.
우리는 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수량화에 가장 적합한 체제다. 인간을 비인격적 숫자로 등치시키고 대체 가능성을 점점 확대해 왔다. ‘인력수급’만 잘 되면 그만. 누구든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성과지표는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니, 수량화야말로 사회의 핵심 작동방식이다. 이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수량화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공기 속에 숫자가 섞여 떠다니고, 어떤 숫자는 나를 옥죄고 있다.
수량화는 개인의 우여곡절과 사연을 몰수한다. 모든 정황을 균질화한다.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비틀어 말하면, ‘수량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말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말의 힘은 지금 당장 눈앞에 없는 것, 논증할 수 없는 것, 숫자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발휘된다. ‘사랑, 우정, 아름다움, 희망, 하나님, 새 세상’ 같은 말은 속이 비어 있는 과자 같지만, 우리에게 각기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측 불가능한 삶의 질곡을 담는 데 ‘말의 유연성(불확실성)’만큼 적당한 그릇이 없다. 숫자는 말의 적이다. 말의 성에 살면서 숫자의 공격에 뻗대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화무십일홍
‘삼류 무림의 세계로구나!’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공간을 이렇게 풍류(?)를 담아 선언하고 나면, 격동하던 마음도 가라앉고 ‘이 풍진 세상’을 견딜 힘이 생긴다.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이 어디 천하를 경영하는 자들의 세계에서만이랴. 작고 구체적인 삶일수록 더욱 치졸하고 비루한 법.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금언은 미리 알려진 모범답안이다. 게으른 방식이지만, 상황을 이겨내는 데 유용할 수 있다. 군에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준다. 곤궁한 사람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위로와 용기를 선물한다.
하지만 금언은 진실의 유령. 진실을 담고 있으나 직접 목격하기가 힘들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현실을 그럴듯한 희망의 말로 바꿈으로써 그 불가항력마저도 내 손아귀에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그렇지, 활짝 핀 꽃도 열흘을 버티긴 힘들지. 변치 않는 진실이긴 한데, 재차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핀 꽃이 도무지 시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피지 못한 꽃망울들은 도무지 필 기회조차 없는 현실 때문이겠지. 권불십년(權不十年). 십년을 넘기는 권력이 없다는데, 얼굴만 바꾸어 연년세세 권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 느낌은 뭐지? 권력을 상대화할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이 세상이 저당 잡혀 있어서인가. ‘권불십년’이라 호기롭게 되뇌지만, 현실 권력을 ‘당분간’ 묵인하는 쓸쓸한 알리바이인지도 모른다.(‘십년만 해먹어라. 딱 십년이다!’)
확고한 금언일수록 믿을 수 없다. 화무십일홍이 맞는가? 권불십년이 맞는가? 이토록 삼류 무림의 세계에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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