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까지
“이게 뭐야?” 어린아이가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자, 삶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의 시기를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즉,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것. 이 이름(명칭)은 어른들이 생각하듯 대상의 본질과 관계없는 자의적 ‘기호’가 아니다. 아이에게 ‘이름’은 처음부터 대상이 갖고 있던 특성이다. 마치 빨간 껍질 속에 하얗고 단단한 과육이 들어 있고 아삭아삭 씹히며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 사과의 특성이듯이, ‘사과’라는 이름도 그 대상의 본래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끝없이 묻는다. ‘이게 뭐야?’
네댓 살이 되면 질문이 바뀐다. ‘엄마는 왜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나무는 왜 흔들려? 해는 왜 저녁엔 안 보여?’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기원이나 존재 이유, 질서에 대한 온갖 기상천외한 가설을 세우고 막힘없이 묻는다.
여기가 인간이 동물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배고픔, 아픔, 공포, 기쁨을 나타내는 자기표현이나 상대방에 대한 경고, 위협, 허용과 같은 신호 행위는 동물에게도 보인다. 하지만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으로 사물을 대신하는 사유능력은 인간에게만 나타난다. 하지만 다섯 살 아이는 세계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세워나가는 게 아니다. 그가 딛고 선 사회, 역사, 문화라는 발판 위에 성립한다(비고츠키, <생각과 말>).
그러다 보니, 문득 의문 하나가 남는다. 만 5살 입학은 ‘과도한 경쟁과 선행 학습, 사교육’에 어린아이들을 몰아넣는 일이다. 이런 반교육적 학교는 여섯 살부터는 견디거나 허용될 만한 곳인가? 학교는 이 세계에 다가가는 배움의 공간은 될 수 없는가?
열쇳말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지인이 조심스레 말한다. “밤새 누가 벽을 두드리더라.” 별일 없는 이 동네에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다. 가만히 들어보니 벽시계가 내는 소리였다. ‘틱, 틱, 틱’ 하는 저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지냈다. 뭔가를 알아채는 감각은 한곳에 얼마나 눌러앉아 있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섬세함은 이방인의 전유물. 안주하는 자에게선 찾을 수 없다.
‘열쇳말’은 한 사회의 문화나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다. 외신에 다시 등장한 ‘banjiha’(반지하)란 말은 한국의 사회적 격차와 주거 형태의 문제점을 단박에 꿰뚫는 열쇳말이리라. ‘반지하’에 쓰인 접두사 ‘반(半)-’은 ‘절반’이란 뜻도 있지만, ‘~와 거의 비슷한’이란 뜻도 있다. ‘반나체’는 절반만 벗은 게 아니라, 거의 다 벗은 상태. ‘반죽음’도 거의 죽게 된 상태이다. ‘반지하’도 ‘절반이 지하’인 집이 아니다. 지하실과 다름없는 집. 끽해야 아침 한때 등이 굽은 햇빛이 지나치는 집이다.
나의 20대 딸은 밥상에 김이 없어도 울고, 있어도 운다. 밥을 아귀차게 잘 먹다가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 내년 봄,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얼마 못 가 이 ‘김’을 못 먹게 되지 않냐고. 그러고 보니 일본 시민단체와 교류하는 선생한테 ‘안전한 한국산 다시마 좀 보내달라는 연락이 일본에서 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딸에게 ‘김’은 우리의 파국적 상황을 예견하는 열쇳말이다.
나는 이 세계의 아픔과 모순을 어떤 열쇳말로 알아채고 있을까. 쩌렁쩌렁 울리는 저 시곗바늘 소리도 못 알아채는 이 무감각함으로….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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