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은 나의 힘
미식가는 오감으로 음식을 만끽한다. 먹기 전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말은 화폐처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것이지만, 가끔 머릿속 식탁 위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훑어보면 헛헛한 세상살이에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나에겐 ‘환멸’이란 말이 뒷맛이 달다. 사전엔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가졌던 꿈이나 기대가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이라 나온다. 하지만 꿈이나 기대의 깨어짐은 실망, 낭패, 좌절감에 가깝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가 깨어지면 배신감만 들 뿐.
환멸은 기대의 깨어짐보다는 진실의 발견에 가깝다. 뻔뻔하고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부조리를 알아챘을 때 느끼는 역겨움 같은 것. 가까운 일상에서 힘과 욕망이 행사되고 실현되는 방식을 목격하면 불현듯 다가온다. 한번 느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감정은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주로 발생한다. 도시생활에, 직장생활에, 누군가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다. 퇴행이나 반동보다는 오히려 머뭇거리지 않는 돌진을 보면서 더 느낀다. 돌진하는 자는 자기 이익과 안위가 목표이고, 집요함, 안면몰수, 타인에 대한 무감각이 무기다.
하지만 거듭 곱씹는다. ‘환(幻)-멸(滅)’, 환상을 멸하다. 헛것이 사라지다. 뜻이 좋구나. 환상이나 기대는 없을수록 좋지. 현실을 가감 없이 바라보게 된다니 권할 만하다. 현실에 매몰되지도,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 것이니 모순을 발견하기에도 최적이다. 환상을 깨고 기대를 접고 자기 할 일만 하다 보면 적멸(寂滅)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오늘도 되뇐다, ‘환멸은 나의 힘!’
영어는 멋있다?
찔린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는 멋있지만 ‘국립추모공원’은 멋없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단계적 일상회복’보다 ‘위드 코로나’가 더 친숙하다던 자니 이 발언도 찬성하겠군. 뭐라 지껄이나 보자!”고 할 독자들이 있겠다 싶었다.
그의 발언에 건질 게 아주 없진 않다. 그는 역대 권력자 가운데 처음으로 우리가 동일 언어, 동일 문화, 동일 감각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줬다. 권력자는 단일 언어체계에 의한 지배를 꿈꾸기 마련인데, 현 대통령은 다언어, 다문화, 다감각의 공생사회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영어가 멋있다는 감각은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영어를 향한 무한욕망과 동떨어진 게 아니다. 한국어가 멋없다는 감각 자체는 후지지만, 다양한 필요와 이유로 영어를 선망하는 현실도 부인할 수 없다. 영어에 대한 그의 감각은 사회적 무의식의 흔적이다.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발언은 사소하다.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정책처럼 ‘있다, 꽃’을 소리 나는 대로 ‘잇다, 꼿’으로 적자는 것도 아니다. 경제성·효율성이란 잣대로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것도 아니다. 기껏 썩은 땅에 들어설 공원 이름에 대한 취향이 튀어나온 거다(영어로 이름을 달아도 한국어는 꿋꿋하게 이어진다). 이름짓기가 그의 업무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소함에 대한 처방도 개인을 향할 수밖에 없다. 속내를 물색없이 말로 드러내는 게 늘 좋은 건 아니다. 입에도 괄약근이 필요하다.
이런 언어 감각이 권력을 등에 업고 남발되지 않길 바란다. 그의 손에 쥐여 준 힘이 언빌리버블하게 막강하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