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워!’
놀랍게도, 말은 용맹한 자보다 비겁한 자들의 편. 그중 최고의 비책이 ‘돌려 말하기’(간접화행) 전법. 명령, 요구, 지시의 의도를 담은 말을 질문, 청유, 단순 진술의 말로 바꿔 상대방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한다. ‘우리 지금 만나!’라 했다가 거절당하느니, ‘약속 있어요?’라 물으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앞사람이 서 있을 때 ‘어이, 앉아!’라 하지 않고 ‘앉읍시다.’ 같은 청유형이나 ‘앉아 주실래요?’ 같은 의문형으로 말한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경색시키지 않고,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고도의 생존전략이다.
이와 정반대 효과를 부르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시끄러워!’이다. ‘집 옮겨!’ ‘나무 잘라!’처럼 명령형은 동사를 쓰지, 형용사를 쓰진 않는다. ‘방이 깨끗하구나’ ‘구름이 희네’ ‘덥군!’ 식으로 감탄형으로는 자주 쓴다. ‘시끄러워’는 지금의 떠들썩한 상황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감탄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장 강력한 명령의 언어가 된다. 듣기 싫은 말을 잘 참는 척하다가 한 옥타브 올려 냅다 내지르는 괴성. ‘조용히 해!’ ‘입 다물어!’ ‘닥쳐!’ 같은 노골적인 명령이 없어도, 대화는 멈추고 타협의 가능성은 불타버린다. ‘네까짓 게, 어디서 감히.’ 같은 귀족적 우월감도 얹힌다. 이렇게 강력한 명령의 기능을 수행하는 형용사는 본 적이 없다.
부모, 선생, 성질 사나운 수많은 갑들, 욱하는 성격의 사람들이 흔히 쓴다. 힘의 과시임과 동시에, 자신의 논리 없음과 상대를 설득할 능력이나 의지 없음을 천하에 선언하는 패악질이다.
직연
'직장 인연’의 줄임말. 이 말은 ‘원고(윤석열 검찰총장)와 한동훈은 직연 등 지속적인 친분관계가 있어 공정한 직무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수 있는 관계’라는 2021년 10월 서울행정법원 1심 판결문에 등장한다. 사전에도 안 나오지만, 이미 직장인들 사이에선 전통적인 혈연, 지연, 학연보다 더 쓸모 있는 인맥이다. 하기야 월급쟁이들한테 직장에서 맺어진 인연만큼 소중한 게 있을 수 없지.
우리에게 ‘연’은 줄(연줄)이나 끈으로 인식된다. ‘줄’은 그것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고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을 낸다. 줄이 닿기만 한다면, 줄을 댈 수만 있다면 뭔 짓을 못하랴. 급하면 남과 다름없는 ‘사돈의 팔촌’과 ‘처삼촌’도 소중한 핏줄이고, 스쳐본 적 없던 10년 선후배도 ‘성님’ ‘동상’으로 탈바꿈한다. 데면데면하게 있다가도 동향이면 ‘우리가 남이가’ 하며 어깨동무를 한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인연에 비해 ‘직연’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가. 가족보다 더 오래 동고동락하며 맺어진 ‘직연’이야말로 검증 가능한 인연이다. 힘 있는 사람과 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출세까진 아니더라도 평탄한 직장생활 정도는 보장된다.
하지만 인연맺기를 삶의 문법으로 익힌 사람은 이 세상을 인연인 것과 인연 아닌 것으로 나누고, 자타, 피아, 시비, 선악을 분별함으로써 급기야 민중이 부처이고 민중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걸 모른 채 살게 된다. ‘끈’을 잘못 잡아 이권과 억견의 ‘끄나풀’이 된 사람들도 허다하다. 인연을 떨쳐버려야 작게는 좋은 정치를, 크게는 생사의 길을 뛰어넘어 깨달음에 이른다더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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