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은유(2): 목소리
나이 들수록 힘이나 논리보다는 공감과 연결성 같은 심성이 문제를 더 잘 푼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상상이나 이성만으로 얻기 어렵다. 눈물과 스며듦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대화하는 이미지로 정치를 그려볼 수 있다. 혁명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 당사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끝없이 대화하는 모습 말이다.
물론, 목소리는 불평등하다. 그래서 지배자나 권력자보다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맨 앞자리에 놓인다. 버려지고 지워지고 억압받고 은폐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언권을 줄 때, 목소리 은유가 갖는 정치적 급진성이 담보된다.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의 목소리야말로 이 세계가 단일한 질서를 갖는 것도 아니며, 적대적인 이원 대립으로 나뉘어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지배와 피지배,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갑과 을, 정신과 육체, 정규직과 비정규직, 자국인과 외국인으로 깔끔하게 양분되지 않는다. 이분법은 우리 머릿속에 선후경중과 효율성을 따지게 하여 ‘뭣이 중헌디?’란 질문을 반복하게 만든다. 목소리 은유는 목소리가 겹칠 때 발생하는 관계의 공명―함께 울림, 함께 울기, 함께 바뀜―을 지향한다. 지금의 권력을 상대화하고 기존의 분할을 다르게 분할하여 무력화한다.
‘육성’. 몸의 소리. 목소리는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다움의 추구는 발성(소리 지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목소리’ 없는 사람,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는 자각은 중요하다. 진보는 어제보다 많은 목소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정치와 은유(3): 가정
당신은 국가를 어떻게 상상하는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사람들은 국가를 가정과 비슷한 걸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어떤 가정으로 비유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갈린다. 보수는 국가를 ‘엄한 아버지’의 가정으로, 진보는 ‘자상한 부모’의 가정으로 비유한다.
엄한 아버지는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내려면 아이가 성실함과 실력을 갖추도록 훈육해야 한다고 본다.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준다. 잘 견뎌낸 아이가 물질적 부와 명예를 얻고 그러지 못한 아이는 가난과 실패를 맛보는 게 당연하다. 삶의 성패는 개인의 책임이다. 그러니 가난뱅이들을 돌보는 것은 쓸데없는 돈 낭비이자 비도덕적인 행위다. 자기 절제와 성실함이 없는 자들에게 복지라니.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반면에 자상한 부모는 자신들의 보살핌으로 아이는 더 선해지며 세상도 더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부모는 아이의 성공과 실패에 동참하며 함께 울고 웃는다.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세계에 대한 책임감과 헌신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물질적 성공과 도덕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훌륭한 삶은 물질적 성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이 세계에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국가는 모든 이들이 기꺼이 삶을 살 수 있도록 옹호할 책임밖에 없다. 역할과 책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위아래로 나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농담조로 말한다. “여러분 모두 진보주의자가 되길 바랍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진보주의자가 되지 않을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잘 안 먹힌다. 내가 보수라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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