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와 편향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자꾸 그 원인을 따지는 버릇이 있다. 국이 짜면 ‘국이 짜구나’라 안 하고 소금을 너무 많이 쳤나 보군, 눈이 작으면 ‘눈이 작구나’라 하지 않고 다 아빠 때문이라 한다. 재판은 원인 찾기 경연장이다.
원인은 무한하다. 당구공을 구르게 한 건 큐대이지만 팔근육을 앞뒤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큐대가 공을 칠 수 없었을 것이다. 팔은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테고. 대뇌피질을 움직이게 한 건 뭘꼬?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얘기도 존재에 연관된 수많은 원인과 조건을 말하는 거겠지.
원인 찾기에는 사회 문화와 정치 성향이 반영된다. 보통은 개인과 환경 중 하나에 몰아주기를 한다. 폭식의 원인은 운동은 안 하고 절제력 없이 음식만 탐하는 개인 때문일까, 식품산업의 로비나 식욕을 자극하는 광고 때문일까. 한두 가지 원인만이 어떤 현상의 유일한 이유가 될 순 없다. 폭식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이 적다거나, 그에 대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도 원인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다른 원인이 있고, 중첩이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된다.
게다가 우리는 책임을 물을 때 일정한 편향성을 갖는다. 당신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라면 재임 기간에 일어난 좋은 일(남북회담)은 대통령 덕분이지만, 나쁜 일(LH 사태)은 구조 탓이라고 말한다. 반대파라면 좋은 일은 누가 하더라도 벌어질 거였고 나쁜 일은 모두 문재인 때문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편향적이다. 이 편향성을 스스로 알아채느냐, 그리고 다른 원인에도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가 과제이다.
같잖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는 지난 29일 오후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열린 경상북도 선대위 출범식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향해 “제가 이런 사람하고 국민 여러분 보는 앞에서 토론을 해야 하겠느냐. 어이가 없다. 정말 같잖다”고 말했다.
곁에 있으면 복잡한 게 단순해진다. 무뎌진다 해도 좋다. 말에도 곁에 있다가 하나가 되는 경우가 있다. ‘마른안주, 비린내, 열쇠’ 같은 말이 그렇다.
‘-잖다/-찮다’는 ‘~(하)지 아니하다’가 줄어들어 앞말을 부정하거나 가치를 떨어뜨리는 뜻을 갖는다. 예도 솔찮게 있다. ‘남부럽잖다, 달갑잖다, 시답잖다, 적잖다, 점잖다’, ‘괜찮다, 귀찮다, 만만찮다, 시원찮다, 심심찮다, 우연찮다, 편찮다, 하찮다’. 형태나 의미가 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말을 부정하는 뜻으로 읽힌다.
‘같다’는 두 대상을 비교한다.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에선 ‘나와 너’가 비교된다. ‘같은 값이면’이라고 하면 두 물건의 값이 같다는 뜻일 테고, ‘같은 물에서 논다’고 하면 두 사람이 같은 환경에서 지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잖다’는 ‘같지 아니하다’와 같지 않다. ‘뭐가 같잖지?’라 물으면 뭘 비교하는지 답하기 수월찮다. 반면에 ‘없이 사는 사람’이라 하면 뭐가 없는지 쉽게 답할 수 있다. ‘같잖게 보다/여기다’처럼 쓰기도 하고, ‘같잖은 말, 같잖은 변명, 같잖은 일, 같잖은 놈’ 식으로도 쓴다. 뒤의 표현은 ‘말 같잖은 말, 변명 같잖은 변명, 일 같잖은 일, 사람 같잖은 놈’처럼 뒷말을 앞말에 다시 쓸 수 있다. ‘꼴같잖다’와 비슷한말이기도 하니 생김새가 변변찮은 사람에게 쓰이다가, 사람 됨됨이가 수준 이하라며 헐뜯는 말이 됐다.
‘같잖다’는 그 말을 쓰는 사람이 스스로 금을 그어놓고 타인이 거기에 못 미친다고 소리치는 말이다. 상대를 전면 부정하는 거라 당사자와 말섞기가 쉽잖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