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리
나는 목소리가 작고 가늘다. 마초처럼 안 보이는지 상대방에게 별다른 경계심을 사지는 않는다. ‘말발’이 잘 안 먹히는 게 문제이긴 하다. 주요 인물이 아닐 듯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뭐, 어떠랴, 틀린 말도 아니니. 말수도 적은 편이라, 그야말로 ‘민주평등사회’에 어울리는 목소리이다.
나는 목소리가 큰 것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내 얘기가 타인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건 싫다. 친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남이 들으니 작게 말하라 한다. 반면에 타인의 큰 소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뿐더러 즐기기까지 한다. 모르는 사람이 거침없이 떠드는 걸 듣는 게 좋다. 버스에서 딴 사람도 들리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운이다. 영화를 보며 “어이구, 거길 왜 또 들어가!” 하며 안타까워하는 어르신의 외침은 얼마나 정겨운지.
그 사람들은 왜 ‘공공장소’에서 크게 말을 할까 궁금하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다. 왜 우리는 큰 소리로 말하는 걸 ‘무례함’이나 ‘무식함’이라는 가치판단과 연결시키는 걸까? 때와 장소를 가려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건 현대인이 갖춰야 할 예의범절이라고 보는 것일 텐데, 그런 감각의 출처는 어딘가? 식당에서 잠시 앉는 자리처럼 시시때때로 생기는 사적 공간은 정말로 나만의 공간인가? 큰 소리는 그 공간을 침범하는 게 분명한가?
사회질서가 무서운 건, 그것이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한덩어리로 구조화함으로써 이 세계를 유일하고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는 나의 이 얄팍한 감각이 의심스럽고 마음에도 안 든다.
간장하다
접시에 초밥을 얹어주며 주인장은 ‘짭짤하니 간장하지 말고 먹으라’고 한다. ‘간장을 찍다’는 뜻일 텐데, 초밥집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거다. 어느 고깃집 외벽에 굵은 글씨로 ‘고기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흐음, 고기를 먹으라는 뜻이렷다.
영어에는 명사였던 단어가 꼴바꿈 없이 그대로 동사로 쓰이기도 한다. ‘fish’는 ‘낚시를 하다’, ‘e-mail’은 ‘이메일을 보내다’라는 뜻인데, 그 명사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bus’는 ‘버스로 이동하다’, ‘text’는 ‘문자를 보내다’라는 식.
한국어는 ‘하다’를 붙여야 한다. ‘공부하다, 운동하다’처럼 앞말에 대부분의 뜻이 담겨 ‘하다’가 할 일이 크게 없는 경우가 많지만, ‘나무하다’나 ‘밥하다’처럼 사물 명사가 오면 달라진다. ‘땔감을 마련하다’, ‘밥을 짓다’라는 뜻을 가지니 말이다. ‘약하다’는 ‘마약을 복용하다’, ‘머리하다’는 ‘머리를 다듬다’, ‘한잔하다’는 ‘한잔 마시다’를 뜻한다. 가만히 보면 그 행동과 결부된 사회문화적 관행과 연결되어 있다. ‘나무하다’가 나무를 심거나 나무로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땔감을 마련한다는 뜻인 것도 나무를 ‘땔감’으로만 대했던 시대상황과 닿아 있겠지.
맥락에 따라 다른 뜻을 갖기도 한다. ‘선물로 귀걸이했어’와 ‘귀걸이하고 권투를 했어’가 다르듯이, ‘저녁해 놓았어’라는 말에 ‘저녁하고 들어갈게’라 답하면 싸움이 날 듯. ‘택시하다, 버스하다’가 노동자에게는 운전으로, 사장에게는 회사운영으로 읽히는 걸 보면, 말 속에는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 게 분명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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