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말
아이를 돌보는 어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는 아이가 말을 배울 때다. 아이의 말은 대부분 짧거나 비슷한 소리를 거듭한다. 맘마, 까까, 찌찌, 응가, 쉬야, 냠냠, 지지, 떼찌, 맴매. 동물 이름도 소리를 연결하여 꼬꼬닭, 야옹이, 멍멍개, 꿀꿀돼지라 한다. ‘어서 자!’ 말고, ‘코 자!’라 해야 잔다.
아이를 묘사하는 말도 따로 있다. 아이는 아장아장 걷고, 응애응애 운다. 운동 감각을 키워주려고 도리도리, 죔죔, 섬마섬마를 한다. 어른은 대(大)자로 누워 자지만 아이들은 잠투정을 하다가도 나비잠을 잔다. 먹은 것 없이 처음 싸는 배내똥은 늙어 죽을 때 한 번 더 싼다. 걸음마를 배우고 아장아장 걷게 될 무렵부터 아이의 말도 팝콘처럼 폭발한다.
낱말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른들이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냉소와 무심함으로 살 때, 그들은 이 복잡미묘한 세계를 처음 겪는 낯섦과 혼란에 맞선다. 아이는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마음의 습관을 타고난다. 이유나 근원을 자꾸 묻는다. 그러다가 엉뚱해진다. 추리는 대부분 틀리지만,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사물과 현상을 직접 관찰한다는 점이다(말 그대로 직-관(直觀)!). 게다가 이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하려는 본능적 성향을 보인다.
이 세계에 대한 관심과 열정, 그리고 끝없는 질문과 의심하는 태도를 지성이라고 한다면, 어린이야말로 지성인이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행복하다. 세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언어를 재료 삼아 삶을 건축해 나가는 한 인간의 집념을 목격하는 일이다.
외로운 사자성어
‘당신의 어휘력’을 평가하는 약방의 감초. “‘당랑거철’이 뭔 뜻이지? 마부작침’은?” 하면서 상대방 기죽이기용 무기로 자주 쓰인다. 한국어능력시험에서도 한두 문제는 거르지 않고 나오니 달달 외우지 않을 수 없다.
딸에게 ‘마이동풍’을 아냐고 물으니, 들어는 봤지만 정확한 뜻을 모른다고 한다. 어릴 적 마을학교에서 소학이나 명심보감을 배웠는데도 모르냐고 하니, 배우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를뿐더러 아는 것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며 사뭇 진지한 ‘변명’을 했다.
모두 한 뭉텅이의 ‘옛날 말’이나 ‘꼰대말’처럼 보이겠지만, 사자성어도 각자의 운명이 있다. ‘표리부동, 명실상부, 시시비비’처럼 한자를 알면 쉽게 알 수 있는 단어는 생명력을 갖지만, ‘교각살우’처럼 겉의미와 속의미를 연결해야 하는 말은 덜 쓰인다. 한술 더 떠서 고사성어는 ‘초나라 항우가’라거나 ‘장자의 제물론을 보면’ 같은 식으로 관련한 옛이야기도 알아야 한다.
사자성어가 유창성이나 어휘력을 판별하는 척도인지 의문이다. 알아두면 좋다는 식으로 퉁칠 일은 아니다. 자신의 문장에 동원되지 않는 말은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식이니 버리자거나 쉬운 말로 바꿔 쓰자고만 할 수도 없다. 문체적 기교든, 아는 체하려는 욕망이든 그것을 써야 하는 순간이 있다. 게다가 축약어 만들기에 면면히 이어지는 방식의 하나다. ‘내로남불, 찍먹부먹, 내돈내산, 낄끼빠빠, 할많하않’. 실질이 요동치지만 형식은 남는다. 뒷방 늙은이 신세이지만 시민권을 깡그리 잃지도 않았다. 시험에 자주 나오지만, 외롭고 어정쩡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