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과 말
수영 강사에게 가장 가르치기 고약한 학생은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로 배우기보다 이미 몸에 밴 동작을 고치는 게 훨씬 어렵다. 말도 그렇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때 쓰기도 했고 여전히 쓸 수도 있지만, 이제는 여러 윤리적인 이유로 쓰지 않는 말들’을 공유하자는 취지다.
‘확찐자, ○린이, ○○다움, 미성숙, 상남자, 장님, 벙어리, 병맛, 여배우, 아줌마, 정신연령, 암 걸릴 뻔했다, 어린애같다, 여자같다, 사춘기냐, 이래서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해.’처럼 다양하다. ‘건강하세요’나 ‘투병’(鬪病), ‘성적 수치심’, ‘결정장애’는 생각지도 못했던 예이다. 신분증을 받고 음성해설 기기를 빌려주는 알바를 한 청년은 한 어린이한테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부모님과 같이 왔냐’고 물었다가 보육원 교사와 함께 온 걸 알고, 그때부터 부모 대신 보호자나 어른이라는 단어를 쓰게 됐다고 한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연령, 장애, 성적 지향, 인종, 종교 등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혐오를 금지하는 평등법이다. 법 제정을 주장하는 이들이 ‘말’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차별은 법 이전에 말과 닿아 있는 낱낱의 삶과 경험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차별은 날마다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관철된다. 가장 흔한 흉기는 말이다. 그러니 내 말에 대한 관찰과 발견의 과정이 필요하다. 차별과 혐오가 그랬듯이 ‘모두를 위한 평등’도 말에서 출발한다.
시간에 쫓기다
비극은 시간을 분리하면서 시작됐다. 죽음의 공포는 시간이 무한히 뻗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간의 무한성과 인생의 유한성. 결국 우리는 죽는다!(아, 무서워.) 반면에 공간의 무한성 앞에서는 안 떤다. 달에 못 가도, 뛰어봤자 금방 땅에 떨어져도 절망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과거와 현재만 있고 미래는 없다. 있어도 현재 벌어지는 사건이 이어지는 2~6개월 정도의 가까운 미래다. 무한한 미래라는 관념이 없다. 생명보험이나 종교가 잘될 리 없다. ‘씨 뿌릴 때, 소 꼴 먹일 무렵’처럼 사건이나 자연현상과 함께 표현될 뿐이다.
문명사회는 시간을 별개의 사물인 것처럼 객관화시키고 여러 유형의 표현을 만들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진 직선 위를 움직이는 사물이다(‘시간이 간다, 온다, 흐른다’). 우리는 이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보내기도’ 한다. 시간은 원처럼 거듭된다(‘봄이 돌아왔다’). 사물화하자 양이나 부피, 길이를 갖게 된다(‘시간이 많다, 적다’, ‘있다, 없다’, ‘시간을 늘리다, 줄이다’).
근대사회는 시간을 화폐로 대한다. 자본주의는 시간의 화폐화로 작동된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아끼고, 벌고, 절약해야’ 한다. 아무리 ‘쪼개어 써도’ 우리는 시간에 ‘쫓긴다’. 일정으로 꽉 찬 삶은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는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은 없애야 할 적이다. 강도에 쫓기듯 시간에 쫓기는 삶에, 시간에 쫓기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노동에 어찌 구원이, 해탈이, 해방이 찾아올 수 있겠나.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