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법칙
궁금했다. 희생자들은 왜 항상 보복이 아닌 ‘사과’를 요구할까? 힘없는 ‘사과’가 뭐가 대수라고. 사과를 해도 비판이 잇따르기 일쑤다. ‘오빤 그게 문제야. 뭘 잘못한지도 모르고 미안하다고 하면 그게 사과야?’라는 노랫말처럼 ‘제대로 사과하기’란 더 어렵다.
사과를 하면 사람들은 그 말의 ‘진정성’을 따지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은 마땅찮다.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거니와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천 갈래의 마음일 테니 뭐가 진짜인지 모른다. 게다가 이 무도하고 염치없는 세상에서 계산 없는 사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일이다.
차라리 사과의 적절성을 따지자. 그걸 알려면 사과의 성립 조건을 따지는 게 좋다. 약속과 다짐은 미래와 관련되지만 사과는 ‘과거’와 관련된다. 사과는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문제 삼을 때 성립한다. 과거를 집중 사과한 모범 사례 하나. 오스트레일리아 전직 총리 케빈 러드는 원주민 아동 강제분리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하면서 ‘반성한다’를 5회, ‘미안하다’를 9회, ‘사과한다’를 18회나 했다. 그가 세 번 연속 ‘아이 앰 소리’(미안합니다)를 외치자 그 나라 전체가 울었다. 사과가 성립하려면 자신의 행위가 듣는 이에게 좋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듣는 이에게 미안함이나 책임감을 표현해야 한다. 피해자의 체면을 세워주고,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려야 한다.
아이 때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빌면 화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은 두 말 사이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기입해야 사과가 된다. 그럴 때라야 힘없는 사과가 새로운 관계맺기의 출발점이 된다.
‘5·18’이라는 말
겉보기에 언어는 불합리하다. ‘버스 파업’이란 말만 봐도, 사람이 아닌 ‘버스’가 어떻게 파업을 하겠나. 밥 말고 ‘도시락’을 먹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따라 했다가는 응급실행이다.
말은 유연하여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을 새롭게 배치하는 데 능숙하다. 일종의 ‘빌려 쓰기’이다. 망치가 없으면 벽돌이 망치가 된다. 절실하면 주먹으로도 못이 박힌다! 가까이 있는 거로 원래의 것을 대신하는 것을 환유라고 하는데,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국수 먹고도 밥 먹었다고 하는데 이때 ‘밥’은 모든 요리를 대표한다.
시간이 특정 사건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한다. 사건이 집단적 기억이 되면 그렇게 된다. 5·18을 비롯해 4·3, 4·19, 6·10, 6·25, 8·15가 그렇다. ‘광주’처럼 장소명을 쓸 수도 있는데, 장소는 그곳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어서 헐겁다.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므로 피할 재간이 없다.
그런 사건은 하루에 끝나지도 않는다. 5·18도 5월27일까지 열흘 동안의 ‘사태’였다. 6·10도 보름을 넘겼고, 4·19는 달포 이상 계속됐으며, 4·3은 장장 7년7개월 동안 이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작일을 사건 전체의 대표자로 삼는다. 첫날은 사건의 촉발점, 민심의 변곡점, 각성, 솟구침, 뒤엉키고 뒤집히는 충격의 시간.
이렇게 글이 주변을 뱅뱅 도는 건 여전히 5·18 앞에 말문이 막히고 죄의식에 휩싸이고, ‘취미처럼’ 분노가 솟구치기 때문일 게다. 눈앞의 부조리함 하나 막아서지 못하니, ‘5·18’을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다. 그렇게 40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