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을 때 쓰는 말. 하지만 어근인 ‘공교’(工巧)는 반대로 ‘솜씨 있고 실력 있다’는 뜻이다. 뛰어난 장인은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으로 공교한 기술을 연마한다. ‘공교한 작품’은 요행이 아니라 성실한 노력과 몰입의 열매다. 홀로 보낸 시간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래서 ‘공교롭다’는 말에는 우연한 일의 뒷면에 인연의 그물이 촘촘히 쳐져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연찮게’(우연하지 않게)가 ‘우연히’란 뜻과 같아진 것처럼, ‘공교롭다’는 한 낱말 안에 ‘우연과 필연(운명)’이 하나라고 새겨놓았다.
공교롭게도 코로나는 우리 사회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 약자, 배제되고 뒤처지고 깨어진 자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 가장 노골적으로 괴롭히다가 가장 나중까지 머무를 것이다. 공교롭게도 코로나는 신천지 교단의 폐쇄성을 숙주 삼아 우리 사회를 들쑤시고 있다. 배타성, 선민의식, 물신숭배, 성장제일주의는 신천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는 독특한 도자기 수리 기법이 있다. ‘금 꿰매기’, ‘금 수선’ 정도로 읽히는 긴쓰쿠로이(金繕い)는 깨어진 도자기를 버리는 대신 옻 성분의 접착제로 조각을 이어 붙이고 금가루로 칠을 하여 깨어진 도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새로 창조하는 기술이다. 흉터를 금빛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부서짐을 감추지 않고 그 또한 역사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다. 우리가 신의 피조물이라면 이 깨어진 세상에서 더욱 연대할 의무밖에 없다. 깨지고 찢어진 사회를 이어 붙이는 공교한 실력을 추구할 뿐이다. 우연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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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다른[異] 끝[端]. 끝이 다르다. 시작과 중간은 같았다. 다른 옳음. 무엇이 옳은지 다르게 생각하는 데서 오는 갈라짐. ‘옳지 않다’고 하려면 ‘옳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옳지 않음은 진리에 미달했다기보다는 거짓의 편에 섰다는 뜻에 가깝다. 어떤 이야기 구조 속에 있느냐에 따라 이단은 서로를 향하는 총알.
이단에 속한 사람은 전통과 권위에 도전한다. ‘이단아’라는 말에는 ‘권위에 맞섬, 엉뚱함, 아웃사이더, 혁신’의 이미지가 풍긴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사이비가 많은데, 신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는 데에 이 종교의 심오함과 딜레마가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으로밖에 가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의 체계이다.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 ‘A이면서 B’라는 등식은 동시에 ‘A도 아니고 B도 아니’라는 말도 된다. 신이면서 인간인 존재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다. 그게 기독교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쉽게 끝이 달라진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우리 곁에 온 사건 때문에 이단에 잘 빠지는 걸까? 아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반드시’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번 더 벌어져야 한다는 욕망이 근본 문제다. 자신이 끝이자 시작이려고 하는 욕망. 우리는 끝도 시작도 아닐지 모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이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다. 우리도 나이면서 남이다.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줄타기는 삶 속에 뒤엉켜 거듭 드러날 뿐. 그 외에는 모른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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