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거래하는 냄새
이름을 안다는 건 애정의 문제다. 나처럼 회색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분하지 못한다. 처제의 고양이가 페르시안이란 것도 오늘 알았다. 무디고 무정하면 ‘꽃’이나 ‘고양이’ 정도로 세상을 성기게 기억한다.
추상은 공통점을 찾으려는 마음의 습관이다. 감각도 추상을 거친다. 다른 감각은 신경세포에서 느낀 감각을 시상(視床)이라는 중계장치를 거쳐 대뇌에 전달하는데, 후각만이 중계장치 없이 바로 전달한다. 게다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과 기억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딴 감각보다 냄새가 오래 기억나는 이유다.
이러한 후각의 직접성 때문에 냄새를 언어로 추상화할 필요가 적었을 것이다. 시각, 청각, 미각어는 사물과 분리되어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물 없이 ‘하양, 검정, 빨강, 노랑, 파랑’의 색깔을 떠올릴 수 있다. 음식 없이도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의 감각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냄새는 다르다. 냄새를 감각하더라도 그것을 담는 어휘가 모자란다. 기본 어휘를 정하기도 어렵다. ‘구린내? 지린내? 비린내? ‘쩐’내? 노린내? 퀴퀴하다? 매캐하다?’ 잘 모르겠다. 추상화가 덜 된 냄새는 주로 사물과 직거래한다. ‘입냄새, 발냄새, 방귀냄새, 짜장면냄새, 곰팡이냄새…’ 끝이 없다. 추상보다는 구체에 가까우니,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직접 겨냥한다. 그래서 우리는 늦은 밤 옆 사람이 뭘 먹고 마셨는지를 쉽게 알아차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도 맡는다. 미국인들은 봉준호 감독에게서 ‘마늘냄새’를 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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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가라앉히기
사람들이 질병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알려면 말을 둘러보라. ‘감기, 골병, 멍’은 ‘든다’고 하지만, ‘배탈, 종기, 욕창’은 ‘났다’고 한다. ‘노망’은 나기도 하고 들기도 한다. 질병을 무서운 인물로 의인화하여 ‘암, 심장병, 대상포진, 감기, 에이즈’에 ‘걸렸다’고 하기도 한다. 몸의 안팎을 드나들거나 괴롭히는 존재.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거나 주변을 떠돌다가 몸 안으로 불쑥 기어들어 오는 존재. 이런 표현들은 모두 은유이다. 인격체가 아닌데도 마음대로 몸을 드나들며 괴롭히는 존재로 상상한다.
코로나에는 ‘감염되다’라는 말을 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녀석은 우리를 몰래 ‘물들여’ 며칠 숨었다가 모습을 드러내니 더 두렵다. 그래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기만 하면 감기 대하듯 할 것이다.
니체는 ‘질병 자체보다 자신의 질병을 생각하느라 고통받지 않도록 병자들의 상상력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지만, 이 곤경을 신의 심판이나 인과응보로 볼 일은 아니다. 이 일이 다 지나간 뒤에 우리는 어떤 언어로 바이러스의 창궐을 생각하게 될까. 어떤 이들은 질병을 친구로, 삶의 여정에 오는 손님으로, 삶의 일부로 대하자고 한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질병을 침략자로 보고 삶과 죽음을 적대적 관계로 보는 언어를 몰아내지 않으면 삶과 죽음을 제대로 대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은유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수전 손택)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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