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다와 달다
한국어에 색채어가 많다고들 한다. 하지만 ‘하얗다, 까맣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다섯 가지가 전부다. 여기에 ‘청색, 녹색’처럼 한자어나 ‘살구색, 오렌지색, 팥색’처럼 식물이나 열매 이름, ‘쥐색, 하늘색, 황토색’처럼 동물이나 자연물에서 온 이름이 더해졌다.
이들 다섯 가지 색에 ‘노랗다, 누렇다’처럼 모음을 바꾸거나, 접미사를 붙여 ‘노르스름’ ‘노리끼리’ ‘누르스름’ ‘누리끼리’를 만든다. 접두사를 붙이면 ‘연노랑’ ‘샛노랑’ ‘진노랑’이 되고 반복하면 ‘노릇노릇’ ‘푸릇푸릇’이 된다. 그런데 이들은 색이 아니라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한다.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거무튀튀하다거나 누리끼리하다고 하면 기분 나쁘다. 튀김이 노릇노릇하면 군침이 돈다. 얼굴이 누렇게 떴으면 쉬어야 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화를 가라앉혀야 한다. 맛도 비슷하다. ‘달다, 쓰다, 짜다, 맵다, 시다, 떫다’를 바탕으로 ‘달콤, 씁쓸, 짭짜름, 시큼, 떨떠름하다’를 만들어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한다.
얼핏 촘촘한 그물처럼 현실을 잘 담는 듯하다. 하지만 말은 세계의 진면목에 비해 허술하기 짝이 없다. ‘달다’만 보자. 사과와 배와 수박과 꿀의 맛은 다 다르다. 그럼에도 사과도 달고 배도 달고 수박도 달고 꿀도 달다고 한다. 말은 세계의 차이를 지워야만 성립한다. 개념은 차이를 단념하고 망각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를 보완할 방법이 없는가? 있다. 내 언어를 믿지 않는 것이다. 모국어를 의심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표현 불가능함을 집요하게 표현하는 것, 인간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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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말 속에는 인간만의 독특함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가 숨어 있다. ‘없다’도 그중 하나인데, ‘없다’의 발견으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던 짐승에서 상상하고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바뀌었다.
우유를 먹다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아빠가 몰래 다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들이 다음날 냉장고 문을 열어 보고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소리를 지른다. “엥, 우유가 없네!?” 냉장고에 우유가 없다는 말을 하려면 냉장고에 우유가 있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없는 게 어찌 우유뿐이겠는가. 코끼리나 젖소도 냉장고에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하필 우유의 부재를 떠올리는 건 어제의 우유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걸 떠올리지 못하면 ‘없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눈앞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훨씬 많다. 그러니 그냥 무심히 행동을 이어가면 된다. ‘없음’(부재)을 알아차리는 건 ‘있음’과 대응될 때만 가능하다. 없음은 있음의 그림자이다.
‘생각’이란 ‘없는 것’을 떠올리는 일이다. ‘없음’의 관념이 생기고 나서야 우리는 상상력, 그리움, 욕망을 갖춘 존재가 되었다. ‘없다’는 말은 지나간 시간을 소환한다. ‘없음’의 발견으로 인간은 시간의 폭을 비약적으로 넓혔다.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까지 당겨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와 미래가 ‘없음’을 디딤돌 삼아 우리 곁에 자유자재로 머무르다 간다. 물론 ‘없음’이 ‘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만 방심해도 순식간에 욕망이 밀고 들어온다. 과한 말이지만, 있으면 동물에 가깝고 없으면 인간에 가깝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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