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이중성
낮엔 천사, 밤엔 악마. 이중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삶을 수련에 비유한다면 삶의 수련은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증오하는 일이 아니다. 선악이 엉망진창 뒤범벅된 수렁 한가운데에서 뭔가를 추구하는 일이리라. 이게 진실에 가깝다는 걸 언어가 보여준다.
하나의 말 속에 정반대의 뜻이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하다니…’라 할 때 쓰인 ‘기막히다’는 그 일이 너무 놀라워 할 말을 잃을 정도라는 뜻이다. 반면에 ‘음식 맛이 기가 막히네’라 할 땐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뜻이다. 이런 예가 적지 않다. ‘괄호 안에 적당한 답을 고르시오’에 쓰인 ‘적당하다’는 거기에 꼭 알맞다는 뜻이지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라 하면 대충 하라는 뜻이다. ‘적당주의’가 여기서 나왔다. 목숨을 뺏는다는 뜻의 ‘죽이다’는 멋지거나 좋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춥거나 무섭거나 징그러울 때 돋던 ‘소름’이 요새는 굉장히 감동적인 장면에서도 돋는다.
놀랍게도 모든 말은 ‘반어적’으로 쓰일 수 있다. 당신도 ‘멋지다, 훌륭하다, 잘났다, 잘했다, 착하다, 꼼꼼하다, 배포가 크다’ 같은 ‘좋은’ 말로 앞사람을 순식간에 ‘열 받게’ 할 수 있다. 겉으로 들리는 말 뒤에 숨겨둔 의미를 눈치 있게 해석해내기 때문이다. 말을 듣는 순간, 아니 듣기 전부터 맥락을 파악하고 가능한 의미들 중 하나를 정확히 집어낸다. 소통이란 겉과 속, 표면과 뒷면이 배반적인 말 사이를 작두 타듯 위태로우면서도 날렵하게 헤엄치는 것이다. 이중성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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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마나 한 말
‘책상이란 뭔가?’라 물으니 ‘책상이 책상이죠!’라 답한다. 선생은 실망한다. 어떤 말이 항상 참일 때 이를 항진명제라고 한다. ‘오늘 비가 오거나 오지 않았다’고 하면 항상 참이다. 참이 아닐 수 없어 허무하다. ‘책상이 책상이죠’라는 말도 ‘3 = 3’이라는 말처럼 늘 참이다. 거짓일 가능성도 없고 새로운 정보를 보태지도 못하는 항진명제는 본질적으로 공허하고 하나 마나 한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곧잘 쓴다. 미끈하고 냉정한 논리와 달리 말에는 다양한 때가 묻어 있고 여지도 많기 때문이다. ‘여자는 여자다’와 ‘남자는 남자다’만 봐도 사회적 통념의 때가 말에 짙게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君君臣臣 父父子子)이라는 말도 하나 마나 한 얘기다. 그럼에도 신분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반동의 언어로도 혁명의 언어로도 읽을 여지가 생긴다. 늙은 선승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는다. ‘너는 너야’라는 말에 위로와 자신감을 얻고,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애는 애다’라 하면서 화를 삭인다.
하느님도 자신을 처음 소개하면서 “나는 나다”라고 했으니, 하나 마나 한 이런 말들이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하나 보다. 거론되는 대상의 고유성을 강조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깨닫거나, 대상에 대한 이해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하는 여러 전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논리가 아니다. 말에는 말하는 사람(들)의 심장과 시간이 박혀 있다. 그나저나 가을은 가을이다.
이 독특한 언어습관은 이웃 일본말에도 똑같이 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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