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담론
‘담론’이라 하는 말은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설명하고, 주장하는 ‘이야기’의 뼈대와 흐름, 그리고 태도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사용된 말을 통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지향하는 바, 또 판단의 기준 등을 분석해 내기도 한다. 정치 담론, 종교 담론, 성 담론 등으로 그 범위와 주제를 나누기도 한다.
쉬운 예로 올림픽 담론을 들 수 있다. 메달 중심으로 본다든지, 국력을 비교한다든지, 개별 출전 선수들을 중심으로 본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종종 가슴 찡한 미담, 속물적인 성공담도 있지만 가장 흔한 것이 아마도 메달 타령일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조용히 소곤거리는 이야기로는 메달보다 군 면제 이야기가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80년 미국과 친미 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규탄하며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고, 소련과 그 동맹들은 1984년 엘에이(LA) 올림픽을 거부했다. 당시 스포츠 강국들의 신문에서는 계속 파행하는 올림픽의 기록이 과연 ‘인간의 최고의 기록’이 될 수 있는지 논쟁을 벌였다. 반면에 당시 한국 언론에는 절호의 기회에 메달을 더 딸 수 있게 됐다고 환호하는 기사가 실렸다.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무척 대조적인 두 가지 담론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우리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세계적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평창 올림픽은 이러한 올림픽 담론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메달 빛깔이나 개수, 그리고 군 면제 같은 담론이 아닌, 더 많은 참여, 평화 지향, 긴장 완화 등 올림픽이 추구하는 어떠한 가치보다 더 귀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기회이다. 이 귀한 이야기 소재들을 정치적으로 오염시키며 판을 깨려는 막말 잔치는 집어치우자. 그것이 올림픽의 수준을 또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길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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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어휘
말은 사회 변화의 영향을 예민하게 받는다. 임시정부 시절에 김구 선생은 국무위원회 주석이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이 ‘주석’이라는 직책과 명칭은 점점 낯설어졌고, 어느샌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언어는 어찌 보면 매우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무척 눈치가 빠른 편이다.
오래간만에 남과 북이 만나 회의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운동경기도 같이 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동안 ‘한국과 북한’ 하는 식의 표현을 자주 했는데, 양측의 당국자들이 만나 이야기할 때는 갑자기 ‘남측’과 ‘북측’이라는 말을 하고 서로 상대방을 ‘귀측’이라고 한다. 우리가 ‘남조선’이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듯이 북측에서는 ‘북한’이라는 말을 내키지 않아 한다.
남과 북의 순서도 다르다. 남측은 양쪽을 일컬을 때 ‘남북’이라는 말을 쓰지만 북측은 ‘북과 남’ 혹은 ‘북남’이라고도 한다. 사실상 두 국가이면서 서로 국가라고 부르는 일을 저어한다. 중국 대륙과 대만이 서로의 문제를 ‘양안 문제’라고 부르는 심정과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이번처럼 남에서 북으로 가는 일을 ‘방북’, 북에서 남으로 오는 것을 ‘방남’이라는 좀 어색한 표현을 쓰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도라산에서 육로로 경계선을 넘을 때는 국경이 아닌 그저 그런 ‘경계선’을 넘는다는 듯이 ‘입경’이라는 말을 쓴다. ‘입국’이니 ‘출국’이니 하는 말이 껄끄럽기 때문이다. 사실상 분단되었으면서도 감성적으로는 그것을 ‘사실’로 확인하는 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더구나 남과 북의 공동 행사라는 것이 늘 하다 말다 하고 있으니 안정적인 어휘와 표현이 형성될 틈이 없다. 작은 행사 하나라도 제도화하고 정규화하면 어떨까? 우리의 언어를 너무 오랫동안 눈치만 보게 하지 말자.
김하수 / 한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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