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호칭
한 사회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서로 말을 거는 방식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뒤집어 말해서 서로 말을 거는 합의된 방식이 없다면 그 사회는 작동 불능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말을 걸기에 불편한 장치가 언어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편리하게 개조를 하거나 수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어를 사용할 때 몹시 불편한 것이 ‘호칭’ 문제다. 특히 누구한테든지 두루두루 쓸 수 있는 ‘보편적 호칭’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고위직이나 하위직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한테 붙여도 실례가 되지 않을 호칭이 우리에게는 딱히 없다. 이는 남에게 말을 걸 때마다 상당한 부담감을 느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우리가 현대에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언어 현대화’를 한 탓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호칭은 주로 가족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가족 관계를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 혹은 ‘시민적 관계’에서는 적절한 호칭을 못 찾아 ‘저기요’ 같은 말 혹은 그럴듯한 직위를 가리키는 말로 우회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가까스로 문제를 피해 간다. 만일 우리가 누구한테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호칭을 만들거나 발견해내면 어떠한 이점이 생길까?
우리에게 보편적 호칭이 생긴다면 남에게 말을 걸 때마다 나이를 포함한 서로의 사회적 위상을 비교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직위나 직종을 미리 알아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스트레스 없이 용건을 말하거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효율성 높으면서 마음 편한 사회가 될 것이다. 아마 직책이나 부서가 바뀔 때마다 굳이 새 명함을 만드는 수고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편하면서도 평등한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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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정본
번역본을 읽은 사람은 원본을 읽은 사람보다 무언가 실력이 달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글의 정통성은 번역본보다 원본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문서를 원본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또 모든 문서는 불가피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야 광범위한 독자가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원전 못지않은 번역본이 나올 수도 있다. 혹시 원본이 어떤 사고로 사라져버렸을 경우에는 원본 못지않은 가치를 번역본이 가지기도 한다. 5세기 초에 인도계의 혈통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불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이라는 불경 전문가는 다량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서유기에 등장해 유명해진 ‘현장 법사’와 더불어 중국어 불경 번역 사업에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 그 이후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사그라지며 힌두교가 발전했고, 불경의 권위는 오히려 중국어본에서 더 빛나게 되었다.
기독교 성서도 그 원전은 고대 히브리어와 고대 그리스어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7세기 초에 나온 영어 성경, 일명 <흠정번역성서> 혹은 <킹 제임스 성서>는 전문적인 성서학자들이 아니라면 굳이 원전을 읽을 필요가 없는, 영어로 된 ‘원전 못지않은 번역본’이다. 그런 것들이 바로 ‘번역 정본’이다. 우리가 수많은 고전 문헌을 번역 없이 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회를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신뢰할 수 있는 고전 번역의 정본화가 절실하다.
남과 북이 대화의 창을 열고 스포츠와 평화를 위한 만남의 계기를 만든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이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전 문헌의 공동 번역 작업도 같이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다. 특히 서로 따로 번역해놓은 <조선왕조실록>을 함께 새로 번역하여 공동 번역 정본을 삼을 수 있으면 더욱 값진 일이 될 것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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