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용어화
2000년 초 우리가 외환위기의 수렁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오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개인 자문역인 ‘21세기 일본의 구상’이라는 모임에서 21세기 일본의 정책 방향을 제안했는데 거기에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삼자는 의견을, 국민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제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반응은 일본보다 한국 사회에서 더 뜨거웠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한 신문이 이를 크게 보도하자 뒤이어 어슷비슷한 신문들이 과열된 기사와 르포를 내보냈다. 당시의 기사 제목들을 살펴보자. “여덟 살도 늦다”, “영어의 바다에 빠뜨려라”, “영어 방송 채널 늘려 ‘귀’ 틔게 해야” 등등의 선정적인 보도가 넘쳐났다. 논점도 일본처럼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삼자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용어로 삼는 것이 낫다는 어느 유명한 소설가의 주장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우리에게는 영어 강풍이 계속 어왔다. 대학에서는 전공을 불문하고 노골적으로 교수와 강사들에게 영어 강의를 강권한다. 취학 전에 영어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낸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사회 일부 영역에서는 영어의 공용어화가 조용히 진행 중인 셈이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영어를 잘하는 것을 모든 공적인 능력의 첫째 기준으로 생각하는 습관에 익숙해져 버렸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향상된 영어 능력으로 미국의 ‘미치광이 전략’에 맞서 힘겹게 협상을 해야 한다. 다른 한편 당시 세웠던 영어마을의 거듭된 적자를 묵묵히 감당해내야 한다. 그러면서 또 이번 노벨 문학상에 한국 작가의 이름은 빠졌고 다른 아시아계가 뽑힌 것을 아쉬워하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무슨 짓을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인가?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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