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의 의의
아파트 이름에 다양한 외래어가 사용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너무 다양하다 못해 이제는 그 이름을 헛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연세 지긋한 분들일수록 이러한 이름을 힘겨워한다. 아파트 이름 못지않게 다양한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특히 신도시의 도로명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다.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등의 낯선 명칭이 붙은 것이다. 과거에 보석 광산이나 가공 공장이 있었던 곳이라면 이해할 만도 하지만, 참으로 지나치게 느닷없이 붙인 이름들이다. 지역과 지명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도시를 개발하며 땅이 가진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유혹적인 상품명을 붙인다는 것이 이렇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지명은 지배자들이 지었다. 그러나 지배자와 무관하게도 일반 민초들은 자기 식대로 명명을 하기도 했다. ‘수릿재, 섶다리, 돌샘, 풋개’ 등의 지명은 그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던 백성들의 명명이었다. 오늘날은 일단 행정적으로 필요한 지명은 국가기관이 정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민속적 명칭은 옛날 백성들이 쓰던 지명을 물려받아 쓰고 있다.
좀 더 넓은 문제를 한번 제기해 보자. 한국인들이 한반도에서 배타적인 ‘주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땅을 우리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역사적 근거는 우리의 언어로 이루어진 지명들이다. 그것도 ‘역사적 연고와 연속성을 가진 지명’들이다. 그래서 옛날의 지배자들이 지은 지명이나 민초들이 지은 지명이나 모두 다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 개발과 토지의 상품화는 이렇게 쌓아온 우리의 권리와 이익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시장에서의 이익과, 역사와 문화 속에서 스스로 지켜야 할 대의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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