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반성
감사의 말이나 사과의 말이 얼마나 진정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표정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게 마련이고, 행동의 변화나 개선이 빨리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반성합니다”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정한 반성의 ‘물증’과 ‘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에 반성문 써 본 사람들은 아마도 기억할 것이다. 죽어라 하고 베껴쓰면 곧 ‘사면’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제대로 반성했는지 뒤를 캐보는 선생님들은 없었다는 것을. 반성한다는 사람은 꽤 많은데 사실상 개선되는 게 없다는 것은 ‘엉터리 반성’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엉터리 반성의 가장 큰 특징은 상투적인 어휘의 남용이다. 그 까닭은 ‘위기의 모면’만을 노리기 때문이다.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벌어 그 순간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상투적으로 말했을 때 “네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니?”라고 되묻는 선생님이 야단치는 분보다 더 무서웠다. 일단 위기만 넘기자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종종 머리를 깎고, 석고대죄를 하고, 읍소를 하고, 큰절을 하면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반성인가 아니면 시간 벌기인가? 우선 그들의 상투적인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가장 흔한 표현이 “뼈를 깎는 반성”인데 그 아까운 뼈 깎을 필요는 없다. ‘재발 방지’와 그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 반성의 가장 큰 성과여야 한다.
이제는 유권자들이 그들에게 되물어야 한다. 당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들이 이런저런 정치, 경제 문제들을 잘못했다고 되뇌면, 바로 그것을 고치라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언론의 책임은 바로 이러한 대화를 중개해주는 것이다. 반성과 뉘우침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정신활동이다. 이 능력으로 정말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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