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언어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내용으로는 일본 정부는 10억엔의 지원 기금을 제공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최종 해결’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주장이 엇갈리고는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소녀상을 이전하는 ‘조건’이 붙었다는 설왕설래가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피해자들에 대한 인격적 배려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슨 사건 브로커들끼리의 합의서 같다.
언어는 늘 일정한 맥락 속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말투와 표정, 그리고 적절한 수사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도덕적인 책임을 표한다고 하면서, 10억엔으로 해결되었다는 둥,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이라는 둥 하는 것은 애당초 도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돈 몇 푼으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고 모욕을 하는 행위에 가깝다.
식민지 지배와 세계대전은 참혹한 상처를 역사에 남겼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인권에 대한 혹은 인도적 문제는 ‘인간의 가치’ 문제를 깊이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프랑스대혁명이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선언하고, 러시아혁명이 노동자들에게 자각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도덕적 계기를 만들어 냈어야 한다.
단순히 약하디약한 여성들의 개인적인 불행이나 고단한 숙명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진 대속(代贖)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앞에서 돈 액수 혹은 재론을 금지한다거나 또 소녀상 이전 등과 같은 표현은 감히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그들이 이러한 역사적 대의를 담을 만한 그릇과 깜냥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이 합의는 치욕의 언어로 가득 찼다. 인간의 가치를 듬뿍 높이는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감동의 시기는 아직 멀었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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