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마녀
드라마를 보며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일삼아 보는 연속극인데도 재미가 여간 아니다. 일일·주말 드라마와 미니시리즈·단막극의 본방송은 물론 재방송까지 ‘복습’하며 ‘드라마 왕국’이 헛것이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일할 때마다 ‘모니터’를 하다 보니 흥미로운 현상을 알게 되었다. ‘압구정 백야’, ‘빛나는 로맨스’, ‘소원을 말해봐’, ‘장미빛 연인들’ 따위에 담긴 공통점이다. ‘오로라 공주’, ‘왔다! 장보리’, ‘웃어라 동해야’, ‘내 딸 서영이’, ‘제빵왕 김탁구’도 마찬가지. 그렇다, 제목에 주인공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여주인공 이름(백야, 오빛나, 한소원, 백장미)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재치가 엿보인다. ‘도보리’는 ‘장보리’가 되어 막을 내렸다. ‘오대산’의 사 남매는 우주를 담았다. 세 아들은 ‘왕성, 금성, 수성’이고 막내딸이 ‘로라’이다. ‘보석 비빔밥’도 딸 ‘비취’와 ‘루비’, 아들 ‘산호’와 ‘호박’이 비벼진 제목이다. 웃어넘기기엔 여운 남는 ‘황금 무지개’의 형제 이름도 있다. 큰아들 ‘김만원’부터 ‘천원, 백원, 십원, 열원, 일원, 영원’까지 이어지는 일곱 남매(‘십원’과 ‘열원’은 쌍둥이)가 그렇다.
“주인공 이름을 제목에 넣는 게 출연자 섭외에 도움 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 경향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작명 원칙의 최우선은 드라마 내용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작품성과 시청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한 피디(PD)의 말이다. 시청률 20%를 훌쩍 넘기며 눈길 끌고 있는 드라마의 원제목은 ‘전설(傳說)의 마녀’, 방송 제목은 ‘전설(?雪)의 마녀’이다. ‘전설’(?雪)은 설욕과 한뜻이다. 앙갚음의 이유가 분명한 여자 주인공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를 보면 고개 끄덕여지는 제목이다. 동음어의 한자를 살짝 비틀어 드라마의 맛을 더한 주성우 피디는 대학 영어연극반에서 함께 놀았던 후배다. ‘마녀의 전설’이었으면 더 우리말다웠을 것이다, 그에게 한마디 건넸다. 씩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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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 지라시
세밑을 앞두고 ‘노점상연합회원’이 라디오에 출연해 노점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서민의 친구인) 길거리 떡볶이, 오뎅을…, 아 죄송합니다….” ‘오뎅’ 대목에서 아차 싶었던 거다. “괜찮아요, 청와대에서도 ‘찌라시’ 하는 판에!” 진행자가 한마디 거든다. 청와대 공식 발표에 ‘찌라시’가 등장하고, 야당 쪽은 “‘찌라시’를 ‘공공기록물’로 인정한 것”이라며 목소리 높이는 세상에 ‘오뎅’이라 하는 게 뭔 대수이겠는가 한 것이다.
청와대 발표에 ‘찌라시’가 등장하기 전에는 ‘증권가 소식지’, ‘사설 정보지’ 등으로 쓴 뒤 ‘속칭(일명) 찌라시’라고 괄호 안에 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찌라시’는 일본에서 온 말이다. 일본 사전 <고지엔>(廣辭苑)은 ‘ちらし[散らし]’의 첫 번째 뜻으로 ‘뿌리는 것’, 두 번째 뜻으로 ‘광고를 위해 배포하는 인쇄물’을 제시한다. 일제 강점기 신문을 찾아보았다. “황군위문품(皇軍慰問品)을 특선(特選)하여 이 위문품을 중심으로, 지라시, 가다로구를 작성하든지…”(ㄷ일보, 1937년 10월23일)에 ‘지라시’와 ‘가다로구(카탈로그)’가 나온다. 황군위문품의 목록(일람표, 상품안내서) 작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발행)부수’를 뜻하는 러시아어 ‘티라시’(тираж) 유래설도 있지만 발음이 비슷할 뿐 ‘찌라시’와 관계있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선전을 위해 만든 종이쪽지. ‘낱장 광고’, ‘선전지’로 순화”로 풀이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는 ‘지라시’이다. ‘チ/ち’가 첫소리일 경우 ‘지’로 쓴다는 외래어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지난 일주일 뉴스 검색 결과는 ‘찌라시’(989건)와 ‘지라시’(29건)로 차이가 크다.(네이버) 특정 매체(ㅁ경제)만 규범을 지키려 애쓴다. 외래어표기법을 좇으면 ‘잔폰’(ちゃんぽん)이지만 사전은 ‘짬뽕’을 표제어로 정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찌라시’를 인정한다. ‘잔폰’과 ‘지라시’ ─ 규범은 멀고, ‘짬뽕’과 ‘찌라시’ ─ 현실은 가깝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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