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하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의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새해 이 자리를 시로 열었다. “그때 그 시가 뭐였지?” 미국에서 사업하는 오랜 벗이 건넨 한마디 때문이다. 학창 시절 펜으로 휘갈겨 써준, 가슴 뛰게 했던 시 한 수를 이제 와 새삼 이 시절에 떠올린 까닭은 캐묻지 않았다. 그저, 벗 앞에서 다시 읊게 된 것이 고마웠을 뿐. 시에 담긴 뜻 따위를 분석하는 짓은 주제넘은 일이니 시어 몇 개만 짚어보자. ‘요조하다’는 ‘여자의 행동이 얌전하고 정숙하다’, ‘기술사’는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부리는 사람’, ‘한천’은 ‘겨울의 차가운 하늘’을 뜻한다. ‘에이다’는 ‘에다’(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의 피동사, ‘옥’은 곧 ‘감옥’, ‘연자’는 ‘연자매(소나 말이 돌리는 큰 맷돌) 위에 있는 굴대 모양의 맷돌’을 가리키고 ‘치레하다’는 ‘실속 이상으로 꾸미어 드러내다’이다.(표준국어대사전) 시가 발표된 때는 ‘3·15 부정선거’로 시끄럽던 1960년, 제목은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작가는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회자되는 ‘깃발’을 쓴 유치환, 그의 호는 청마(靑馬)이다.
……………………………………………………………………………………………………………… 고명딸
새해 들어 선보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의 주인공을 찾아 연예인 몇이 자식 노릇을 한다는 설정이다. ‘신개념 리얼리티 관찰 프로그램’을 내세운 이 제작물의 출연자는 단출했다. 외딴곳에 사는 노부부와 자식뻘의 남자 넷, 여자 하나. 거기에 개 몇 마리가 양념처럼 등장했다. 첫 방송치고는 시청률이 나쁘지 않았던 이 프로그램에 고개 갸웃거리게 한 대목이 나왔다. ‘4남1녀의 외동딸을 소개한다’는 자막이다. ‘아들 많은 집의 외딸’은 ‘고명딸’이고 ‘외동딸’은 무남독녀를 이르는 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외동딸’은 ‘외동아들’(외아들)처럼 ‘외딸’을 귀엽게 이르는 말이다. 사전은 ‘외딸’을 ‘다른 자식 없이 단 하나뿐인 딸’로 설명하면서 다음 뜻으로 ‘다른 여자 동기 없이 하나뿐인 딸(독녀)’로 풀이하고 있다. 아울러 뜻풀이 뒤에는 참고 어휘로 ‘고명딸’을 제시하고 있다. 사전의 두 번째 뜻풀이에 따르면 ‘4남1녀의 외동딸’이 틀린 표현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이 경우엔 ‘고명딸’이라 콕 찍어 표현하는 게 낫겠다. ‘고명딸’이라 하는 것이 뜻을 분명하게 할뿐더러, 이 말의 어원을 밝혀보면 ‘외동딸’보다 한결 살갑게 다가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고명딸’은 ‘고명+딸’로 분석된다. ‘고명’은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고명딸’은 음식을 만들 때 주재료 위에 예쁘게 장식하는 고명처럼 아들만 있는 집에 예쁘게 있는 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명딸’을 전남과 평안 지방에서 ‘양념딸’이라고 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고명딸’은 고명처럼 예쁜 딸이란 뜻이다.(21세기 세종계획 누리집) ‘고명’에 기대어 나온 ‘고명아들’이 없는 까닭은 그래서일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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