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이름
오감이라는 게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나이 들수록 무뎌지는 게 감각이라는 것을 알기에 잘 보고 듣고 맛볼 수 있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여기며 살아간다. 휘황한 조명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공연장에서, 살아 있는 소리가 찰랑대며 휘감아 도는 음악회장에서 더욱 느낄 수 있는 감사함이다. 가림막 걷힌 숭례문을 바라볼 때도 그랬다. 먼발치에서 보면 용마루의 웅장함이,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자연스러운 돌벽의 질박함과 처마 끝 단청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그 아름답던 단청이 지금은 문제투성이가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단청’(丹靑)은 옛날식 집의 벽,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빛깔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린 그림이다.(표준국어대사전) 단청은 안료를 만드는 광물질인 ‘단사’와 ‘청확’을 붙여 이르는 말로 ‘단확’, ‘단벽’, ‘단록’이라고도 한다.(브리태니커) 단청에는 글자에서처럼 붉음(丹)과 푸름(靑)만 있는 게 아니다. 파랑(동), 하양(서), 빨강(남), 검정(북), 노랑(중앙)인 ‘오방색’을 바탕으로 다양한 빛깔을 담고 있다. 단청의 기능은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옹이를 가리고 해충과 부식을 막아 목재의 단점을 보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 숭례문 단청 작업에는 일본산 안료 11종이 쓰였다고 한다. 군청(남색), 삼청(하늘빛과 같은 푸른빛), 양록(진한 초록), 뇌록(잿빛을 띤 녹색), 주홍(붉은빛 띤 주황), 장단(주홍보다 약간 밝은 빛, 광명단), 황(황토색), 하엽(초록색), 연백(흰색), 호분(흰색), 먹물(검정)이다. 괄호 안 풀이는 따로 찾아 넣은 것이다. 색이 아닌 안료 이름이기는 하지만 한자어 이름이 학창 시절에 본 ‘먼셀 표색계’ 기호처럼 낯설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통 빛깔 어휘 231개를 모아 90개로 정리해 이름과 번호를 매긴 ‘한국 전통표준색명표’는 그래서 의미 있다. 치자색, 분홍색처럼 쉬운 말이 더 많았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 염지
집게손가락,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염전에 만든 못, 염분이 스며 있는 땅, 불경을 달리 이르는 말, 여러 가지 색깔을 물들인 종이, 손가락을 솥 속에 넣어 국물의 맛을 본다는 뜻으로 남의 물건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짐을 이르는 말, 번뇌를 태워 없애 지혜가 더욱 성하는 단계인 십지의 넷째 단계, 겉면이 매끈매끈하며 윤이 나는 내수성 종이, 자세히 잘 앎, ‘부추’의 함경도 방언. 이렇듯 여러 뜻으로 쓰이는 이것은 ‘부추’의 뜻일 때만 토박이말이고 나머지는 소금(鹽), 염색(染), 곱다(艶), 생각(念) 따위의 한자가 붙은 낱말 ‘염지’다.(표준국어대사전) ‘염지’의 뜻풀이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김치무리 담그기’를 이것이라 했고(동국이상국집), ‘봉선화로 손톱 물들이는 풍속’의 한자어를 ‘염지’라 하기도 한다.(한국세시풍속사전) 그런가 하면, 원뜻은 ‘소금절이’이지만 ‘훈제품 따위를 가공할 때 향신료, 조미료 등을 첨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일본어 ‘시오즈케’·에서 온 것이다.
40~50대 주부 중에 이 뜻의 ‘염지’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인터넷에서 ‘염지’를 검색해보니 ‘염지 닭’, ‘치킨 염지’, ‘닭가슴살 염지’가 연관검색어로 제시된다. 최근 누리꾼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비어치킨+염지’는 8만건이 넘는다.(구글) ‘비어치킨’은 맥주 캔이나 맥주가 담긴 전용 조리 용기를 닭 뱃속에 찔러 넣고 구워 만드는 음식이다. 증발한 맥주가 닭고기에 배게 하기 위해서다. ‘염지’는 팍팍한 고깃살을 부드럽게,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한 것이다. “캔 맥주를 이용한 ‘비어치킨’에서 인체 유해 물질 검출”을 다룬 기사를 접한 뒤 알게 된 ‘염지’. 언중에게 낯선 용어인 이 말 대신 쓸 표현을 찾아보니 그럴듯한 게 있었다. ‘밑간’(음식을 만들기 전에 재료에 미리 해 놓는 간)이나 ‘재다’(음식을 양념 따위로 맛이 들도록 무치거나 발라 두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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