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도그파이트’(dogfight), ‘머니볼’(moneyball), ‘시빌 워’(civil war), ‘시 배틀’(sea battle)…. 영화나 게임 제목이 아니다. 에스케이 와이번스(비룡)와 한화 이글스(독수리)의 대결을 공중전에 비유해 ‘도그파이트’로, 재벌 그룹인 엘지와 삼성의 맞대결은 ‘머니볼’로, 두산과 넥센 서울 팀끼리의 경기는 내전에 빗대어 ‘시빌 워’라 부른 것이다. 항구도시 부산(롯데)과 인천(에스케이)의 팀 싸움을 ‘시 배틀’이라 한 것도 재밌다. ‘용쟁호투’(에스케이-기아), ‘공대육’(空對陸, 에스케이-엔씨)처럼 한자 조어도 빠지지 않는다. 두산(베어스)과 기아(타이거즈)의 대결은 단군신화를 끌어와 ‘단군매치’, 전라도 연고팀(기아)과 경상도 연고팀(엔씨)의 겨룸은 ‘화개장터’로 부르기도 하니 재치 만점인 별칭이다.
막바지까지 상위권 다툼이 치열했던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끝났다. 엎치락뒤치락 호각지세로 겨루는 판세는 감독들에게는 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었겠지만 팬들에게는 점입가경의 재미를 안겨주었다. ‘가을 야구’를 위해 4강을 놓고 시새우는 형국은 여러 표현으로 다뤄졌다. 각 팀들이 듣기 싫어한 표현은 ‘탈락’, ‘추락’, ‘도전’ 등일 것이고 반긴 것은 ‘진입’, ‘복귀’, ‘탈환’, ‘유지’, ‘수성’, ‘고수’, ‘사수’ 따위일 것이다. 이 가운데 유독 ‘사수’(死守)가 눈에 띄었다.
이 표현이 눈에 띈 까닭은 어감이 전투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두산과의 승차를 1.5경기로 벌리며 3위를 사수하는 한편…’(ㄷ일보), ‘최종전에 전력을 다해 극적인 2위 사수를 노리게 되었다’(ㅇ인터넷매체), ‘박병호는 2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 사수에 나섰다’(ㄴ통신). 박병호에게 홈런왕은 ‘사수’ 대상이 아니었다. 굳이 ‘사수’여야 했을까 싶다. ‘사수’의 남발이 거슬린다. 이런 표현에 쓰인 ‘사수’는 ‘차지한 물건이나 형세 따위를 굳게 지킴’인 ‘고수’라 하는 게 걸맞다. 내일부터 ‘도전’과 ‘수성’이 펼쳐질 ‘가을 야구’가 시작된다.
……………………………………………………………………………………………………………… 십이십이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라디오 시보 직후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박자’는 구호를 뉴스 앞에 넣어야 했었다. 일테면 ‘정각 열 시를 알려드립니다’, 뚜뚜뚜 뚜!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박자. 열 시 뉴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 해야 했다는 것이다. 언론 통제가 지엄하던 시절, 어느 날 어느 아나운서가 큰 ‘사고’를 쳤다. 기계적으로 읊어대던 구호를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 뽑자’로 한 것이다. 정권에 항거하는 듯한 ‘멘트’는 전국에 생방송되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등을 내세운 ‘유신헌법’은 12월27일에 공포되었다. 그런데 왜 ‘시월유신’일까. “정부는 앞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10·17 특별선언’을 ‘시월유신’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ㄷ일보, 1972년 10월28일) 언론은 ‘10월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10·17(십일칠) 선언’으로 기록했다. 이처럼 기념일이나 역사적인 날을 숫자로 표현하는 경우는 제법 많다. ‘일이일(1·21) 사태(김신조 사건)’, ‘삼일오(3·15) 부정선거(개표 조작)’, ‘오일륙(5·16) 군사정변’, ‘오일칠(5·17) 쿠데타(내란사건)’, ‘십이륙(10·26) 사건’ 등이다.(위키백과)
역사적인 날을 읽는 방법은 달은 그대로, 날짜는 숫자 하나씩 끊어 발음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관례일 뿐 원칙은 아니다. 순종 장례식 때 일어난 ‘육십(6·10) 만세 운동’과 ‘6월 민주화 운동’의 시작인 ‘육십(6·10) 항쟁’처럼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12월12일에 벌어진 ‘십이십이(12·12) 군사반란(사태)’도 빼놓을 수 없다. “‘십이’가 반복되어 짝을 맞추려는 심리 탓”, “‘시비시비’(是非是非)와 발음이 같아서”라는 주장이 있지만 추정일 뿐이다. 그나저나 ‘자신의 실수를 뉴스 끝낸 뒤까지도 몰랐던’ 그 아나운서는 어찌 되었을까. ‘사고’ 직후 정보당국에 불려갔으나 훈방된 뒤 다른 부서로 옮겼다고 한다. ‘…뿌리 뽑자’가 단순 실수였는지, 전직 사유가 ‘사고’와 직접 관련 있었는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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