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발음
지난주 어느 날 저녁에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수 몇몇과 어울렸다. 학위 논문 심사를 마친 이들의 뒤풀이 자리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은 자리였다. 국어 선생들과 만난 자리에 국어 얘기가 빠질 리 없었다. 지난 호에 실린 ‘땅거미’를 읽은 소감을 물으니 전공에 따라 다양한 답이 돌아왔다. “‘땅거미’는 삭막한 도시 환경에 어울릴 정경이 아니니 언중의 일상 어휘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 고향에서는 ‘땅끔’이라 했던 걸 보면 표준어권의 현실 발음 [땅꺼미]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땅끔’, ‘땅끄미’의 ‘-끔(끄미)’은 ‘그믈다(까무러지다, 꺼지다)’에 어원을 둔 ‘그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 발음은 [땅꺼미]이다”…. 이처럼 여러 갈래로 오가던 ‘땅거미 논의’는 이내 한뜻으로 모여졌다. ‘현실 발음을 사전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 발음을 사전에 반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태조사와 연구가 여럿 나와 있기 때문이다. 2003년에 발표된 국립국어원의 ‘서울말 발음 실태 조사 결과’는 [땅꺼미]가 표준 발음인 [땅거미]보다 널리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국어원은 ‘사전의 발음 정보와 다른 경우가 많아 표준어를 재사정할 필요성이 드러났다’며 ‘발음 정보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2012년에 국립국어원이 시행한 ‘표준 발음법 영향 평가’ 연구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음화의 경우) 표준 발음법을 따랐을 때와 현실 발음대로 했을 때 괴리가 있으니 규범에서는 원칙만 제시한 뒤 사전에서 두 가지 발음 모두 인정’할 수 있으며 ‘맞춤법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복수 표준 발음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이다. 한마디로 복수 표준어처럼 복수 표준 발음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의 발음 정보는 박제가 아닌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간 쌓아온 연구·조사 결과가 올해 10월에 문을 열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우리말샘)에 담기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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救命胴衣
아시아나항공 214편의 사고 원인 등을 두고 여러 얘기가 나온다. 엉뚱한 괴담이설도 떠다닌다. ‘이번 사고는 7월7일에 일어났다. 한국인 승객은 77명이고 사고 비행기는 7년째 운항 중인 보잉 777이다. 항공편 숫자 214를 한 자씩 더하면 7이 되고 미국인 승객 61명을 더한 것, 중국과 일본 국적 승객 142명의 합도 1+4+2=7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세븐의 저주’이다. 사고가 일어난 샌프란시스코 기준(7월6일 오전)이 아닌 한국 시간(7월7일 새벽)으로 따진 것만 봐도 억지임을 알 수 있다. 견강부회라 하기에도 민망한 이야기는 숫자 놀음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한 방송은 ‘연장자에 대한 존경과 권위주의라는 한국의 문화 특성 탓에 한국 조종사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 모호한 내용을 보도했다. 한국의 존칭어 등이 조종사들끼리의 효율적이고 빠른 의사소통을 방해해 사고가 발생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ㅅ신문) 미국 작가 맬컴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밝힌 ‘한국어의 존대와 완곡 화법이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특정 국가의 (언어)문화를 사고 원인으로 몰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 사고의 이모저모를 접하면서 우리나라 ㄱ항공 좌석에서 본 안내문구가 떠올랐다. ‘着席中에는 安全帶를 매십시오’, ‘救命胴衣는 座席밑에 있습니다’. 20~30대 10명에게 병기된 영어를 지운 이 안내문을 보여주었다. 떠듬떠듬 한 자씩이라도 읽어 낸 이는 딱 한 명. 한자나 영어를 모르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읽기는커녕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던 이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니 큰 잘못이라도 한 양 고개 숙이며 수줍게 웃는다. 그들은 잘못한 게 없다. ‘앉아 계실 때는 안전벨트를 매십시오’, ‘구명복은 좌석 밑에 있습니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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