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모
목요일 깊은 밤에 안방극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원봉사 희망 프로젝트, 나누면 행복’이다. 엊그제 방송의 주인공은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갓난아기였다. 심장 수술을 받아 파리한 아기를 보니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랬던 핏덩이에 살이 오르고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양부모가 나서기 전까지 보살피는 자원봉사자의 돌봄 덕분이다. 프로그램은 아기의 뜻깊은 백일을 담아냈다. 한 배우가 ‘일일엄마’로 나서 씻기고 먹이고 재우며 돌봐준 것이다. 그의 역할은 ‘위탁모’였다.
위탁모(가정)’를 사전에서 찾으니 나오지 않는다. 방송에서 써도 되겠느냐'는 방송 작가의 문의가 ‘위탁모’를 글감으로 삼게 했다. 무심히 흘렸던 관련 표현을 찾아보았다. ‘(입양 전) 위탁모’는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다. 그 이전에 “위탁양육보호제도를 처음 실시한 곳은 홀트아동복지회로 67년부터였다… 위탁양육부모의 조건은…”(ㅁ경제, 1976년 3월15일)에서처럼 ‘위탁양육 부모’가 보이기도 한다. 위탁은 ‘남에게 사물이나 사람의 책임을 맡김’으로, 여기에 붙어 만들어진 낱말은 ‘-무역’, ‘-품’, ‘-생’, ‘-인’ 등 32개였다.(표준국어대사전) 이에 기대어 ‘위탁모’의 뜻을 새기면 ‘일정한 계약 아래 남에게 아이를 맡긴 여자’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탁모’와 다른 것이다.
‘조어의 문제’로 ‘위탁모’를 배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낼지 모른다. 역할에 걸맞은 말을 찾자면 ‘피(被)위탁모’와 ‘탁아모’(보호자 대신 어린아이를 맡아 돌보는 여자), ‘수탁(다른 사람의 의뢰나 부탁을 받음)모’쯤 되겠지만 이 또한 왠지 마뜩잖다. 이참에 ‘위탁모: 부모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맡고 있는 사회복지기관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 또는 주로 아이가 입양되기 전까지 기관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고려대 한국어대사전)처럼 사전에 올려 자리 잡아 주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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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올해 태양이 가장 높게 뜬 순간은 지난 6월21일 낮 2시4분께였다. 낮 길이가 가장 긴 하지의 한때였다. 여름 기운 짙어지는 칠월에 접어들면서 더위가 깊어간다. 한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낮 길이는 한겨울 동지까지 짧아진다. 해넘이가 빨라지면 어스름이 찾아오는 때도 빨라진다. 황혼이 깃들고 땅거미 지는 시간이 일러지는 것이다. 황혼은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또는 그때의 어스름한 빛’이고, 땅거미는 ‘해가 진 뒤 어스레한 상태. 또는 그런 때’이니 비슷한 표현이지만 말맛은 조금 다르다. ‘빛’(황혼)과 ‘그림자’(땅거미), 어느 쪽을 보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옅은 밤’인 박야(薄夜), ‘저녁 그늘’인 석음(夕陰), ‘어스레한 낮’의 뜻인 훈일도 사전에 올라 있지만 죽은말(死語)에 가깝다.
해거름 무렵 드리워지는 ‘땅거미’는 노래와 시에 잦게 등장한다. 노래로 불리고 시어로 살아 있는 ‘땅거미’가 나오는 곡은 얼마나 될까. ‘땅거미’를 노래한 이는 많았다. 같은 곡이어도 부르는 가수, 편곡이 다른 경우까지 따져보니 132곡이었다. 한명훈·이범용(‘꿈의 대화’), 이선희(‘영’, ‘혼자된 사랑’), 남궁옥분(‘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김승진(‘스잔’)의 것처럼 귀에 익은 노래는 물론 그 옛날 배호(‘먼 여로’)의 곡도 있었다. 얼마 전 타계한 이종환(‘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의 시 낭송을 포함해 발음은 하나같이 [땅꺼미]였다. 에스지 워너비(‘꿈의 대화’ 아르앤비 솔(R&B Soul) 버전)는 [땅·거미]라 했지만 유의미하지 않았다. 어쿠스틱 버전에서는 [땅꺼미]로 했으니 악센트 때문이었기에 그렇다. [땅꺼미]는 ‘땅거밋과의 거미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땅에 사는 거미’를 가리킨다. 사전은 황혼녘의 ‘땅거미’ 발음을 [땅거미]로 제시하고 있다. [땅꺼미]가 대세인 현실 발음과 다른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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