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누구
보름 전 이 자리를 통해서 “섬뜩한 느낌 주는 ‘살인 진드기’라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이후 ‘진드기’(ㅈ 일보, ㅊ 교수), ‘공포의 작명’(ㅈ 일보, ㅇ 논설위원) 등의 제목으로 비슷한 뜻을 담은 칼럼이 나왔다. 줄기는 같아도 풀어내는 방식은 달랐다. 동물생태학자와 기자답게 전공과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아 썼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를 두고 ‘누구’라도 떠들 수 있지만 논리를 갖춰 매체에 글을 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엊그제 라디오에서 ‘기미, 주근깨 따위에 효과가 있다’는 치료제 광고가 나왔다. ‘(피부 고운) 공주는 아무나…’ 하는 대목에 언어 직관을 거스르는 내용이 있었다. ‘…아무나 될 수 없지만(이 치료제를 바르면 가능하다)’이 아닌 ‘(공주는) 아무나 될 수 있다’는 문장으로 끝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방송”이란 금언에 익숙해서였을지 모른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책’처럼 유사한 보기가 많았으니까.
‘아무(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르는 인칭 대명사)’는 일반적으로 ‘누구’와 뜻 차이가 없이 쓰인다. ‘나, 라도와 같은 조사와 함께 쓰일 때는 긍정의 뜻을 가진 서술어와 호응’하기도 하는 게 ‘아무’이지만 ‘흔히 부정의 뜻을 가진 서술어와 호응’(표준국어대사전)하기에 피부 치료제 광고가 낯설게 들린 것이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를 두고 이틀을 고민하다 ‘꽃은 피었다’로 결론 내렸다. ‘-이’는 사실을 진술한 문장, ‘-은’은 주관적인 ‘그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같은 듯 비슷한 표현도 상황에 맞춰 제대로 쓰는 게 바른 말글살이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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