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되다
우리는 매우 많은 한자말을 쓴다. 그러나 한자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자로 적을 필요는 없다.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한자병용을 주장하는 이들일지라도 ‘학교, 비행기, 세탁소, 미장원, 극장’ 같은 낱말까지 꼭 한자로 적어야 한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자말 중에는 한문 어순으로 된 말이 있다. ‘살인’(殺人) 같은 말이다. ‘살’이 동사이고 ‘인’이 목적어다. 우리말과는 어순이 다르다.
“북한 선원들이 탄 선박이 피랍된 사실을 확인했다.” 북한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의 한 구절이다. 기사에 쓰인 ‘피랍’(被拉)도 한문 어순으로 된 낱말이다. ‘납치되다’라는 뜻의 피동어로서 역시 우리말과는 어순이 다르다. ‘피랍’ 자체가 피동어인데, 거기에 ‘되다’라는 피동접미사를 붙이면 이중피동이 된다. 이중피동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방사선에 피폭되다”와 같은 말은 이중피동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땐 이중피동을 쓰는 것이 편하다. 이중피동을 피한답시고 ‘피랍된’을 ‘피랍한’으로 하면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과 동떨어진다. 그러나 ‘피랍된’도 아니고 ‘피랍한’도 아닌 ‘납치된’이라는 좋은 말이 있다. ‘납치된’이라고 하면 눈에도, 귀에도 훨씬 빨리 들어온다. 다만 제목에 쓸 때는 접미사를 빼버리고 ‘피랍’으로 써야 하는데, 이때 ‘납치’를 쓰면 주객이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이때도 한 글자만 더 붙여 ‘납치돼’로 하면 해결된다.
우재욱/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