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서
언어예절
기록을 남긴다는 점에서 문서, 곧 적발을 중히 여기는데, 기록 역시 생각과 말의 갈무리다. 관청에서는 일이 주로 적발로 오간다. 그림·글·말·사진들도 디지털로 갈무리하는 데 이르렀지만 그 방식이 얼마나 안전하고 오래갈지는 모른다.
살다 보면 부탁할 일이 잦아진다. 부탁이나 당부로 안 되면 통사정을 한다. 관청을 상대할 때, 시비를 법으로 다투는 방식이 있고, 청원·탄원·진정·질의·건의·제안 … 들도 한다.
‘진정’은 같은 소리 다른 말이 열댓 가지가 넘는데, 실제 쓰이는 말은 서넛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진정이 들어오다, 진정을 하다, 진정이 몇 건이다, 진정서를 내다’처럼 쓰는데, 이때는 진정(陳情)을 쓴다. ‘사정이 사촌보다 낫다’는 말처럼 개인이든 관청이든 사정도 잘만 하면 어느 정도 먹히는 까닭에 나온 말이다. 전문가를 거치지 않고 돈과 품을 덜 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진정’이다. 억울하고 답답할 때 관청에 적발로 하소연하는 것으로, 꽤 유용한 방식이다.
다만 염치·분수·의리·정분에 얽매여 참고 지내는 걸 미덕인 양 잘 활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저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 등 기본 얼개를 갖춰 사실을 더덜없이 엮으면 된다. 기사문체와 다를 게 없지만, 사정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점이 좀 특이하달까.
남에게 억울한 짓을 하지 말아야겠지만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참기만 해서는 사회가 맑아지지 않는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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