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주기
언어예절
“함지에 보리밥을 퍼 담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며, 채독에서 쌀을 한 보시기 퍼 동냥을 준다”처럼 활용하여 ‘퍼-’로 쓰는 말에 ‘푸다’가 있다. 이에 ‘주다’를 합치고 뒷가지 ‘기’를 붙여 ‘퍼주기’를 만들어 쓴다.
몇 해 이 말의 폭발력은 대단했다. 2000년대 초부터 반북정서를 대변해, 햇볕·포용, 평화·번영 등 정부의 대북정책을 뭉뚱그려 비판하는 용어로 쓰였다. 말 자체가 주는 단순성과 적확성으로 정부의 대북정책을 꼬집고 무력화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 말을 부려쓰는 쪽에서는 애초 헤아림 같은 것은 버렸다.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 원조를 구별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싸잡은 것이다. 남북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배려하는 이의 ‘말씀’은 아니란 말이다.
이후 ‘퍼주기’의 쓰임은 선거, 외교·통상, 단체교섭 등으로 그 영역이 넓어진다. 선심 공약, 선심 정책, 조공 외교, 선물 외교 …에서 ‘퍼주기’가 그 앞말을 대신했다. 이는 고정된 말뜻으로 굳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말로서 여러 언어 환경에서 적응한다는 뜻이겠다.
나눔·베풂·선심·보시보다 떳떳하고 좋은 게 뭐가 있겠는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본디 대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호주의’나 ‘주고받기’가 상대되는 말이 되겠지만, 최근 들어서는 ‘퍼주기’도 ‘주고받기’도 듣기가 어려워졌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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