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농자천하지대본 - 이진숙(여.서울 노원구 하계동)
안녕하세요. 어렵게 살던 어린시절, 저희 친정 아버지는 잘 먹는 사람을 좋아하셨지요. 근데 자식이라곤 저와 남동생 단둘인데, 우린 둘 다 약골이었어요. 잘 먹지를 못했거든요. 끼니 때마다 밥상을 놓고 고사를 지내는 우리 남매에게 울화가 치민 아버진 툭하면 당신 베개를 내던지시곤 하셨지요.
"왜 푹푹 안 퍼먹냐 인석들아 엉!"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진 우리에게 식전 막걸리 한 잔씩을 먹이셨지요. 술기운이 돌면 식욕이 좋아져서 밥을 잘 먹을 수 있다시더라구요. 그것은 베개 던지시는 것보다 효과가 있었죠. 문제는 아침부터 취해서 학교에 간다는 거지만요.
어느 날은 제법 취기가 올라서 교실에 앉아있는데, 교실 전체가 뱅 그르르 돌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수업 2교시까지 취해서 책상에 누워만 있었어요. 막걸리는 그만 먹을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셨습니다.
"그깟 공부가 밥을 멕여주냐? 옷을 주냐? 그저 건강이 최고랑께."
그래서 우리 남매는 매일 삼시 세 끼마다 강제로 반주를 한 잔씩 했습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한번은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왔는데 한참을 놀다보니 배가 고프더라구요. 먹을 걸 찾으니 있어야지요. 그래서 라면 몇 봉지를 외상으로 사다가 끊였습니다. 상을 차리다 보니 막걸리 생각이 났어요. 친구들에게 우리집 식사문화를 말했더니, 모두들 한 잔씩 걸치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한 잔씩 마셨는데 그만 친구들이 뻗은 거예요. 뒤늦게 친구부모님들이 이 사실을 알고 집단으로 몰려와 우리 부모님께 자식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호통을 치셨는데, 우리 아버지 눈 하나 깜짝 안하시고 이러시더군요.
"아따, 똑같이 먹구 우리 아인 멀쩡한디, 나자빠지긴...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도 있소. 막걸리 한 잔쯤이야 끄떡 안하는 장사로 키울 생각은 않구..."
하여튼 아버지의 갖은 노력으로 우리 남매는 점차 튼튼한 체력의 소유가가 되긴 했습니다. 막걸리도 더 이상은 마시지 않아도 되었구요. 하지만 막걸리와 저는 피하려해도 피할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저는 농과대학을 다녔어요. 근데 농과대학에서는 '농자천하지대본'을 내세워 농자는 맥주도 아닌 그렇다고 소주도 아닌 막걸리를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막걸리를 퍼마시게 하는데 막걸리엔 이력이 붙은 저인지라 주량이 대단했어요. 사발로 열 잔쯤은 문제도 없더라구요. 근데 막걸리 마시는 제 아름다운 모습을 은밀히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지요. 2학년 선배였어요. 그가 술의 'ㅅ(시옷)'자만 들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알코올 알레르기 환자였기에 제가 아주 근사해보였나봐요. 우리는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답니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학교앞 주점이었는데 그는 따르고 저는 마시고, 그가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면 제가 입을 벌려 먹는 식이었지요. 제가 워낙 마시는 편인지라 저만 가면 그 술집 아주머니는 엄청 좋아하는 겁니다. 무척이나 반기셨죠. 근데 나중에 듣자니 그 아줌마가 글쎄 저를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로 알았다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잘되어 나갔지요.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남자가 요핑게 조핑계를 대며 미구라지처럼 살살 바져나가는 겁니다. 소문에 듣자니 더블 데이트라는 걸 하더라구요. 괴로운 마음에 마셨습니다. 락카페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소주방에서 소주칵테일도 마셨어요. 물론 완전히 갔지요. 그에게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내 목소리가 이상하다구. 끄윽-. 좀 마셨지. 막걸리 1차,맥주 2차,소주 3차... 주태백이 이진숙도 취할 날이 있구려. 더블 데이트를 하신다구요? 끄윽-. 나는 일부일처제 나라의 국민이올시다. 끄윽-."
그러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진숙아 제발 좀 그만해! 이거 스피커폰이야. 우리 식구 모두 모여 네가 하는 소릴 듣는다구.."
끝이었습니다.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 누가 주정뱅이 여자와 교제하는 걸 허락하겠어요. 이튿날 그가 조용히 저를 불러냈습니다.
"할말이 있어. 우리 아버지가 며느리 될 여자 주량 구경 좀 하잰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시아버지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맹세했다. 그리고 그 맹세는 지금까지 지켜져 오고 있습니다. 안주거리 될 만한 게 상 위에 오르면 시아버님은 제게 술 한 잔을 권하세요. 그 재미로 저는 매일 매일 안주도 되고 반찬도 되는 걸 선정하느라 고심하지만 나날이 늘어만 가는 주량 속에 행복이 솔솔 익는 냄새... 괜찮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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