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바지를 좀더 내리세요
살면서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을 많이 겪기도 하겠지만, 이런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2년 전, 저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아주 죽도록 고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콧물이나 두통같은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마치 속을 다 뒤집어 놓으려는 듯 튀어나오는 기침은 정말 참기 힘들었죠.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TV를 보다가도 그놈의 기침은 절 그냥 두는 법이 없이 마구마구 나오더군요. 밤잠을 설쳐가며 기침에 시달린지 어언 석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침을 할 때마다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니 옆구리가 왜 아플까? 혹시 기침이 심해 폐에 무슨 이상이라도... 아니면 늑막염이 된 건 아닐까?' 걱정이 태산 같았죠. 평소, 한국 표준 여성보다 몸무게로 보나 키로보나 월등히 우량했던 저를 건강 그 자체로만 여기시던 부모님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셨던지 병원에 가 보라며 아주 걱정스런 얼굴을 하시는 거 있죠. '아! 얼마 만에 가보는 병원이냐...' 너무 건강하다 보니 오랜만에 가보는 병원은 차라리 반갑더군요. 내과에 가서 만난 의사 선생님께서는 점잖게 생기신 중년 신사였는데, 진찰을 받고 이차저차 증상을 얘기하니 심각한 얼굴로 늑막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자세한 진찰을 위해 방사선과에 가서 X-ray를 찍어오라고 하시기에 전 떨리는 가슴을 안고 방사선과로 갔습니다. 몇 년 전 늑막염을 앓고 있던 친구에게서 뼈에 고인 물을 빼기 위해 갈비뼈에 주사기를 꽂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전 아주 얼어 있었습니다. 방사선과에 있는 선생님은 아주 젊은 분이셨는데 저는 그 와중에도 '어머, 참 참한 총각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 잘생긴 총각이 저에게 약간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일단 골반부를 찍어야 하니까, 침대에 누우시죠."
침대에 누워 제 배위로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카메라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할 때에도 전'참한 총각과 저의 늑막염'생각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목소리로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바지를 조금 내리세요"
전 조금 의외였지만 그냥 찔끔찔끔 바지를 허리 조금 아래까지 내렸죠. 그랬더니 그 남자가 절 냉정한 눈으로 쏘아보더니 말했습니다.
"더 내리세요."
'어머, 어머,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전 조금 당황하여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더 안 내리면 안된다는 시선에 전 그야말로 주눅이 들어 바지를 조금 더 내렸습니다. '아! 빠금히 내보인 내 배꼽!' 부끄러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지르며 이러는 거예요.
"내 참! 아, 허리띠를 풀어서 바지를 엉덩이까지 내리세요."
아니 이 무슨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립니까? 외간 남정네 앞에서 바지를 내리라니... 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아, 바지를 벗어야 단추랑 허리띠가 X-ray에 안 나타날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생각 좀 해보세요. 제가 바지를 내리면 바로 뭐가 나옵니까. 그 자리에서 제 팬티가 노출되는 거 아니겠어요. 전 설마 저 사람이 진정으로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 다시 그 사람을 봤지만 그는 제가 아주 못마땅한 듯 마구마구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불초소녀, 건강관리 잘못하는 바람에 외간남자 앞에서 팬티를 보이고 마는군요.' 전 눈을 찔끈 감고 바지를 내렸습니다. 촬영은 30초도 안되어 끝났지만 전 그 시간이 영원과도 같았고, 그 이후에는 아주 정신이 빠져서 흉부촬영시 가운을 입고는 속옷도 벗지 않고 목걸이도 빼지 않아 그 '참한 총각'을 다시 한번 화나게 하고 말았답니다. 촬영이 끝나고 그는 제 필름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애교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때요? 별 이상 없죠?"
그는 제 흉부필름과 골반필름을 차례로 점검하더니 아주 묘한 미소를 띠우며 내과를 다시 가 보라더군요. '어머, 미소의 참 의미는 뭘까?' 저는 혼자서 예쁜 척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과로 와서 그 점잖은 선생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 선생님도 제 필름을 검토하고 계셨습니다.
"어때요, 선생님?"
제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필름을 잘 살펴보라시며, 불이 들어온 판위에 필름을 끼우셨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커다란 검은 덩어리! '아니, 저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 난 죽나 보다. 저건 무슨 암세포덩어리가 아닐까...?' 무식한 제 머릿속엔 온통 제가 죽는다는 생각만 날 뿐이었습니다. 그 암울함, 그 섬뜩함... 두 분 이해하시겠어요?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때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침으로 인해 폐가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약을 먹고 병원에 좀 다니면 괜찮겠군요. 됐습니다. 처방전을 줄테니 약 받아가고, 주사 한대 맞고 가세요."
선생님은 금세 아무일 없다는 듯 다음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더군요. 전 조금 어리둥절해서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저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런 절 의아한 듯 바라보시더니 말하셨습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럼 저 시커먼 건 뭐예요? 무슨 혹 같은데..."
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물어보았죠.
"아- 저거요?"
선생님은 아까 그 참한 총각과 거의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어요.
"아가씨, 변비 있죠? 저거 변비에요. 말 난 김에 변비약도 처방해 줄까요?"
아! 이 무슨 망신입니까? 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병원을 나왔습니다. 귓불과 등줄기가 후끈후끈 한 것이 그날 어떻게 집엘 왔는지... 그 참한 총각의 묘한 미소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