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뛰는 놈 위에 나는 자슥
이 사연은 14년 전인 1983년의 한 일화입니다. 제 나이 한창이던 21세. 머나먼 제주시에서 대학에 다닌다고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하양읍이란 곳까지 와 2년째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군입대 전이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 모가지만 빨고 인근에 있는 여대생들과 미팅도 자주하며 맘껏 수컷임을 과시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로 이미 확실한 애인이 생겼고, 그 후론 돈이 지출되는 미팅은 참석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친구들이 주선하는 미팅에 참석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피팅'일 경우만 아르바이트 삼아 참석했고, 다른 어떠한 방식의 미팅도 거절하며 지냈습니다. 피팅이란 것을 아시는 지요? 혹시나 하는 노파심으로 간단히 언급해 둡시다. 미팅에는 기팅, 베팅, 소개팅, 폰팅... 등 종류도 부지기수지만 피팅이란, 남자가 여자보다 한 명 더 많게 참석하여 여자가 남자를 지명하는 식으로 파트너가 되고, 맺어지지 못한 남자에게 위로금조로 얼마씩 주는 방식입니다. 일부지역에 따라 '피보기 미팅'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본 사건 이전에도 이미 여성이 선택권이 있어 당시 한창 유행하던 피팅에 아르바이트로 두 번 참가해 조금은 치사한 수법으로 지명 받지 못한 남자가 되어 매회 1-2만원 정도의 순 수익인 짭짤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애인과 함께 당시의 저에겐 최고급 요리인 통닭을 먹곤 했습니다. 괜찮은 아르바이트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 친구로 부터 피팅 참석을 요청 받아 애인에게 저녁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번 피팅은 5팀의 커플이 탄생하여 위로금으로 쌍 당 5천원씩 주기로 돼 있으니 커피 값을 계산하고도 2만원은 족히 올릴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였습니다. 드디어 약속시간이 임박해짐에 따라 서서히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세면 청소를 하지 않아 텁수룩한 뒷머리에는 큼지막한 까치 집이 하나 지어져 있었고, 분장을 통해 입가에는 침이 조금 말라붙은 자국, 그리고 왼쪽 속눈썹엔 누르티티한 눈곱이 힘겹게 붙어 있었으며, 런닝띠가 조금 보이도록 목이 푹 패인 T셔츠, 이 꾀죄죄한 모습은 확실한 자신감을 주었고, 일 마치고 막을 통닭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정각 오후 5시. 저는 발걸음도 가볍게 다방 문을 열고 다섯 명의 남자 친구들이 얘기하고 있는 널찍한 구석 자리에 앉았습니다. 주선한 친구가 저를 보고 말하더군요.
"니, 꼴이 그게 뭐고?"
"으응, 강의도 없고 해서 자다보니 지금 일어나서 달려오는 거야, 하마터면 못 올 뻔했어."
침도 안 바르고 능청을 떠는 저의 모습에 저 자신도 투철한 직업의식은 참 무시 못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슥, 세수라도 좀 하지. 내 체면도 있는데...."
"흐흐흐...."
이윽고 우리들의 파트너가 될 여대생 다섯 명이 우르르 앞 자리로 와 "좀 늦었어요." 하며 여성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앉았습니다. 주선자인 친구는 상대를 둘러보더니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싱글벙글하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 다 모였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요? 아가씨! 여기 커피 돌리세요."
"아니, 아가씨! 제꺼 한잔은 소젖으로 주소."
이 같은 저의 외침은 쪼다가 되기 위한 기선제압이었습니다. 상대 여대생들은 밖에서 짜고 온 것 같은 모습으로 가위.바위.보를 하여 지명 순서를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결정했습니다. 차가 나온 직후 상대에게 잘 보이려 흘러내린 머리칼 하나라도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친구, 점잖게 보이려 받침접시까지 들고 커피를 마시는 친구, 지그시 웃음만을 흘리고 있는 친구 등등 제각기 지명 받으려는 몸짓은 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급기야, 눈이 작으면서도 귀엽게 보이는 첫 번째 아가씨가 6명의 후보 중 1차 지명을 하려는 순간 옆자리 친구들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얼굴이 호형이고 아담한 체구를 가진 친구가 선택당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쪽 끝에 앉아 있던 친구 하나가 은근히 생각했던 아가씨의 지명이 자신을 피해가자 돌연 제 영업에 심상치 않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커피잔 옆에 씹던 껌을 놓아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 이 놈이 글쎄 그 껌을 손가락으로 넓게 펴서 '따다닥'소리를 몇 번 내더니 다시 입에 넣어 씹는 게 아닙니까? 앞 자리의 지명권자들은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습니다. '아니 강적이군. 그러나 흥, 손가락으로 껌 장난하다 다시 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야? 혹 콧구멍에 놓였다 다시 씹는다면 모르겠지만. 만반의 준비를 해온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 어림도 없지.' 이렇게 생각하며 저는 그 정도엔 개의치 않고 새로운 작전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런닝끝을 조금 더 당기며 태연히 성냥개비로 귀를 후비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윽고 2차, 3차, 4차. 지명이 저와 그 친구를 피해간 후 미간이 꽤나 넓고 인자하면서도 조금은 어리숙하게 생긴 여대생이 마지막으로 지명할 차례가 남았을 때 그 강적이 엄청난 내공으로 공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잠깐만요, 긴장하니까 갑자기 소변이 마렵네요. 화장실에 갔다 와서 합시다."
이렇듯 저의 경쟁자는 급히 뛰어갔습니다. 2분이 지났을까? 다시 자리에 돌아온 그는 의자 뒤로 몸을 최대한 젖혀 앉아 있었고, 앞 좌석 지명권자의 얼굴이 갑자기 당황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왜 저럴까?' 순간 불길한 예감이 저의 뇌리를 스쳤고, 옆에 앉은 경쟁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앗! 그가 남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것도 안이 누리끼리 하게 비치는 팬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취하며 빨래하기 싫어 속옷을 보름 입고 다시 뒤집어 보름 입은 뒤 버려버리는 그의 습성에서 오늘은 뒤집어 입은 날이었습니다. '앗, 졌구나!' 이렇게 깨닫는 순간 그 느낌은 신음소리로 변해 '으으...'하는 소리가 이 사이를 비집어 나오고 있었고,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임기응변 식 흠집내기로 다리를 꼬아 앉아 양말을 반쯤 내리고 발 뒤꿈치를 서너 번 힘차게 긁어 보았지만 이미 대세는 결정 난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마지막 지명권자의 손가락이 결국 저를 가리킬 때 저의 눈은 졸지에 사팔이 되었고, 이내 쏟아지는 참패의 허망함 그것은 생돈 5천원의 지출이었습니다. 그것도 다행히 낙승을 예상하고 그냥 나올까 하다 만원 권 한 장을 갖고 왔으니 만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개망신당할 뻔했습니다. 돈을 챙겨 찻값을 계산하고 여유 있게 지퍼를 올리며 사라지는 그를 부러운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웬수 같은 앞 자리의 아가씨에게 미소를 억지로 띠우며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다음에 보자고 한 후 맥 풀린 저의 발걸음은 자취 방을 향했습니다. 결국 그날 애인과 함께 통닭 대신 닭 똥집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끝으로 사연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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