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사랑하면 될텐데
- 박완서 선생님께
방바닥에 내려앉은 아침햇살을
아기는 손으로 집어 듭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햇살 잡다가
아기는 그만 울음이 터집니다
울음소리에 놀란 햇살은
슬그머니 문틈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봄햇살 속에 사랑스런 손녀를 안고 계실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 보며 강원도 초등학교 분교의 어느 친지가 보내 준 동시 한 편을 적어 봅니다. 얼마 전 따님을 통해 보내 주신 선생님의 새 작품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여행길에서 사다 주신 검은 목도리도 감사히 받았습니다. 언젠가 영국을 다녀오시며 선물로 주신 워즈워드의 `수선화`란 시와 그림이 새겨진 갸름한 접시에 저는 향나무 연필들을 담아 두었답니다. 신경숙 씨의 <외딴 방>을 읽을 무렵 선생님의 책을 읽었는데 다른 시대를 살아온 두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삶은 아름답고 그 삶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다 따뜻하고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체험적 진실, 웃음과 눈물 속에 그대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작가들의 그 빼어난 묘사력에도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 좋은 글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어느새 봄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저희 수녀원 정원에도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이젠 천리향, 수선화가 얼굴을 보이겠지요. "슬픔 가득할 땐 꽃 핀 걸 봐도 힘들기만 하다"고 어느 날 조용히 말씀하시던 선생님과 저의 첫만남은 수년 전,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 중의 두 사람과 사별을 해야 했던 고통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졌기에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가슴 한 켠이 아려 오곤 합니다. 요즘 매주 <서울주보>에 글을 쓰시느라 얼마나 힘드실까 싶어 선생님의 애독자이며, 자매들인 저희는 좋은 글감이 많이 생기실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기로 했답니다.
3월은 제가 수녀원에 입회했던 달이기에 더욱 새롭게 느껴집니다. 30년 전 제가 공부하던 강의실에 한참 어린 후배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 많은 세월 동안 사랑과 기도의 종소리에 제대로 깨어 살지 못한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연중 피정 강론에서 듣게 된 신부님의 말씀이 계속 제 안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수도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어떤 누구도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십시오. 그리고 석고상같이 경직되어 있지 말고 실수해도 좋으니 좀 웃는 얼굴로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할 수 있도록..."
서 신부님의 그 말씀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늘상 말로만 거듭했을 뿐 진정한 사랑의 길에선 멀리 있는 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늘 조금씩 겁먹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고 몸과 마음을 사려 온 자신을 들여다보며 저는 요즘 계속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합니다. `이봐, 뭐가 두렵지? 사랑하면 될텐데`하고 말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늘 절제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등의 말을 접어 두었고, 어줍잖은 체면 때문에 인색하고 차갑게 군 적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다른 수녀원에 계신 수녀님과 함께 교도소엘 가서 반가운 이들을 만났는데도 제가 너무 굳어 있었는지 저와의 첫만남을 설레며 고대하던 어떤 형제는 후에 편지로 `저는 수녀님을 보긴 했지만 느끼진 못한 것 같다`고 적어 보냈습니다. 작별하는 순간에도 수인들에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스스럼없이 포옹해 주던 옆의 수녀님과, 어색한 몸짓으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저의 냉랭한 모습이 비교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필요한 용기, 인내, 겸손도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애쓰는 이 연습생을 선생님도 기도중에 기억해 주세요. 어느 때보다도 저의 사랑 없음을 절감하는 요즘은 항상 넉넉하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글이 가장 부럽습니다. 사소한 일들로 우울했던 마음을 털고 흙냄새 가득한 정원으로 꽃삽을 들고 나가야겠습니다. 봄까치꽃이 가득한 길을 선생님과 봄햇살 속에 산책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항상 미풍처럼 은은하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천리향 향기 속에 띄우는 남쪽의 봄을 먼저 받아 주십시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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