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꽃씨와 도둑
- 금아 피천득 선생님께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가끔 큰 욕심에 눈먼 이들을 보거나 특히 요즘처럼 엄청난 비자금 파문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다시 읽어 보는 피천득 선생님의 `꽃씨와 도둑`이란 짧은 시는 포근한 감동으로 우리를 미소짓게 합니다. 또한 선생님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방금 저는 선생님의 시집 <생명>을 동네 책방에서 사들고 오는 길입니다. 지난번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 주신 책은 다른 수녀님들도 읽게 하려고 도서실에 내어 놓았기에 다시 읽고 싶어 제 몫으로 하나 구한 것이지요.
이번 가을엔 큰 상 -인촌상-을 받으셔서 선생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이들로부터 정성스런 축하도 많이 받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처음에 그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 저는 즉시 그 기사를 오려서 독일에 있는 선생님의 열렬한 애독자인 김효정 씨에게 보냈답니다.
거의 20년 전 봄, 제가 시인 홍윤숙 선생님과 함께 라일락 향기 가득한 망원동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청빈하고 겸허한 수사님같이 느껴졌던 선생님의 첫인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지금은 아파트에 사시지만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마루와, 서재라고 하기엔 너무도 자그만 선생님 방의 낡은 책상과 의자, 오래된 영문 시집들이 꽂혀 있는 작은 서가와 사랑하는 가족들과 시인들의 사진이 놓여진 선생님의 낯익은 방을 저는 자주 떠올려 보곤 합니다. 제자들이 선물했다는 녹음기로 음악도 즐겨 들으시고 시인들의 육성으로 된 시 낭송도 자주 들으시는 선생님은 가끔 저에게 시나 수필을 읽게 해 녹음하시기도 했습니다. 위스키 한 방울도 살짝 떨어뜨려 손수 타주시는 커피를 마시며 선생님의 옛 앨범이나 친필로 써놓으신 좋은 글모음 노트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내가 좋아서 뽑아 놓은 수녀님의 시 한 구절인데..."
뜻밖에도 저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의 몇 구절을 보여 주시며 환희 웃으시던 선생님의 그 말씀은 얼마나 기쁘고 놀랍던지 저는 부끄러움도 잊고 선생님의 귀한 노트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슬프고 어두운 이야긴 신문에서만 읽어도 넉넉하니 수녀님은 제발 맑고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이 써주세요"하고 저를 만날 때마다 당부하시던 선생님. 어쩌다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늦은 시간에 수녀원으로 돌아올 때면 택시를 태워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곤 하셨던 선생님. 잠시 해외에 다녀온다고 제가 비행장에서 전화를 드리면 "아이구 어쩌나, 내가 비행장에 나갔어야 하는데..."하시며 안타까움을 표현하시던 선생님의 정겨운 음성을 저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선생님을 가까이 뵈면서 저는 친절과 겸손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가끔 선생님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아름다운 연극, 영화, 음악을 감상하게 되면 선생님의 그 유명한 수필 `반사적 광영`에서처럼 저는 선생님 덕분에 더욱 기쁘고 행복해지는 시간들을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뵈올 때 동반하고 간 손님이 프로스트, 셸리, 예이츠 등등 시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시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해마다 부활절과 성탄절이면 극히 간결한 축원의 말과 이름만 써서 보내 주시는 카드들인데도 선생님의 육필이 소중하게 여겨져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습니다. 평소에 말씀이 적으시듯이 수필과 시도 적게 쓰시고, 쓰시더라도 워낙 절제된 표현을 쓰시니 선생님의 글씨 한 조각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은 묵은 달력에서 떼어낸 르느아르와 모네의 그림 중 한 장을 보여 주시며 선택하라고 하셔서 제가 두 장 다 갖고 싶다고 했더니 매우 아까워하시며 한 장을 주시던 그 모습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늘 아름다운 그림카드나 엽서를 보며 행복해 하시는 소년 같은 모습은 여든이 훨씬 넘으신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산책을 즐기고 약간의 엽서를 모으며 살았다"는 선생님의 고백이 가슴 찡하게 울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림 엽서나 카드를 보면 선생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은 영문학사에 나오는 시인들의 생가와 글귀가 들어 있는 엽서 몇 장을 저의 조그만 선물로 선생님께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우리 마음에 따스한 등불을 켜는 12월엔 선생님께서도 최소한 몇 장의 카드나 엽서를 쓰시겠지요? 몇 해 전 왕적과 예이츠의 시를 적어 주신 카드, 피사로의 `감자 줍는 이들`과 미국의 어느 현대화가의 `하얀 다리` 그리고 라파엘로의 성모상이 그려진 카드들은 선생님이 보내 주신 것들 중 제가 특별히 아끼는 것입니다.
전화 드릴 때마다 "네에..."하고 길게 빼는 음성으로 정성스럽게 대답하시는 선생님, 지난번 해외여행은 무사히 다녀 오셨는지요? 가장 사랑하시는 따님, 아드님, 손자, 손녀들과도 정겨운 시간을 가지셨을테지요. 유리 그림이 아름다운 성당에도 더러 가보셨는지요?
"난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와서 영세받을 자격이 없다"고 미루시다가 이제는 고인이 되신 예수회 김태관 신부님으로부터 교리와 영세를 받으셨을 때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자연과 인간을 사랑한 따뜻한 마음의 시인. 청빈한 삶의 모델인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선생님께 보내 드릴 카드를 준비하다가 예전에 제게 보내 주신 편지 한 통을 다시 읽어 봅니다.
`주신 편지 감사합니다. 글월 받는 것만도 영광이온데 분에 넘치는 말씀을 주셔서 송구합니다... 저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을 찾고 마음에 맞는 사람만을 대하려 듭니다.미운 것, 불결한 것은 피하려고만 들고 많은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받아야겠습니다. 얼마 전 수녀님께서 편찮으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건강을 소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문복이 가득하시기를...`
당신 스스로를 늘 이기적이라고 자책하시는 선생님의 겸허한 글은 이기적이면서도 깊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저를 반성하게 합니다. 끝으로 선생님게서 근래에 쓰신 듯한 `고백`이란 시 한 편을 조용히 낭송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머지않아 서울이나 부산에서 만나 뵐 수 있길 기대하며 그동안은 기도 안에서 뵙겠습니다.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 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진정 한 폭의 수채화 같고, 아베 마리아의 선율처럼 잔잔한 선생님의 날들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게하시길 빕니다.
(199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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